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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목차 1 - 차이레(茶入) 카라모노(唐物)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하츠하나(唐物肩衝茶入 銘初花)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닛타(唐物肩衝茶入 銘新田)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시바타(唐物肩衝茶入 銘楢柴)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키타노(唐物肩衝茶入 銘北野)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아부라야(唐物肩衝茶入 銘油屋)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교도(唐物肩衝茶入 銘玉堂)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오소자쿠라(唐物肩衝茶入 銘遅桜)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코가(唐物肩衝茶入 銘久我)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츠쿠시(唐物肩衝茶入 銘筑紫)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타네무라(唐物肩衝茶入 銘種村)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후도(唐物肩衝茶入 銘不動)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레 명 미야오(唐物肩衝茶入 銘宮王屋) ●카라모노 카타츠키차이..

雜/대정명기감 2022.04.15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9 - 총설9

명기와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시대에 축척된 히가시야마어물(東山御物), 그 외 무라타 주코(村田珠光)·타케노 죠오(武野紹鴎)·센노 리큐(千利休) 및 같은 부류의 종장(宗匠) 등이 매우 아끼거나 이름을 붙인 상자를 만드는 등 여러 풍류적인 색채를 더한 명기들은 그 수가 본디 많았다고 할지라도, 겐키(元亀)·텐쇼(天正)의 난이나 오사카성 함락 등으로 인하여 그 수가 크게 줄게 되었다. 한편 도쿠가와씨의 천하가 이제 확립되면서 대소 영주 모두 에도로 참근교대(参勤交代)를 하게 되면서 웅장한 저택을 갖추게 되고, 막부도 천하태평책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다도 풍류를 장려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면서 명기를 원하는 자들이 급증하게 되면서 종래의 명물만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수요를 충족할 수 ..

雜/대정명기감 2021.08.09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8 - 총설8

도쿠가와(徳川)와 명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마냥 연기를 하면서까지 명기를 다루지는 못했다. 그가 군정(軍政) 상 사려있고 주도면밀해야 하는 대장이기에 물론 명기의 가치는 알았지만, 실가(實價) 이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철저함을 처음부터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마츠다이라 넨세이(松平念誓)에게서 하츠하나 카타츠키 차이레(初花肩衝茶入)를 얻고 그 대신 영지 500석을 주라고 말했던 것처럼 명기에 대한 관념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곧바로 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격퇴를 축하하는 물품으로 보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떻게 명기이용 방법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기에는 부족하다. 케이초(慶長) 5년(1600)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카케카..

雜/대정명기감 2021.08.05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7 - 총설7

명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정책에서 완전히 노부나가를 답습하였는데, 명기 이용책에서는 이를 더더욱 확장하여 다대한 효과를 거두었다. 히데요시가 다사(茶事)를 좋아하고 명기를 애용한 것은 노부나가 이상으로, 텐쇼(天正) 10년(1582) 노부나가 사후에 이미 노부나가가 데리고 있던 츠다 소큐, 센노 리큐 등을 임용하여 이들 사카이 출신 종장을 통해 재빨리 사카이슈(堺衆)의 관심을 샀다. 노부나가를 대신한 지 얼마 되지 않고, 풍운망창(風雲莽蒼)으로서 천하가 어느 쪽으로 정해졌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 초암(草庵)에서 차 끓는 소리를 들었으며, 황금다실(金屋)에서 다이스(台子) 다회를 열면서 큐슈 정벌에서도 리큐 등을 대동하고 다다르는 곳마다 풍류아회(風流雅会)를 열었다. 오다와라..

雜/대정명기감 2021.08.05

사천석굴탕방기 - 4일 광원 천불애广元千佛崖1

아침이 밝았다. 호텔에 붙어 있는 벽화 벽에는 검각으로 들어가는 협곡 입구가 조각되어 있다 배의 조타? 이제 첫 일정인 광원 천불애로 왔다. 장강의 큰 지류 중 하나인 가릉강 중경에서 장강과 만난다 천불애 내부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과거 검각으로 들어가던 촉도의 일부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사천성 성도로 들어가던 좁은 길의 일부였다는 것 물론 본격적인 우리가 아는 잔도는 더 안으로 들어가야 되지만 안으로 더 들어간다 여기가 천불애 입구. 광원 천불애(广元千佛崖)는 말 그대로 수천개의 불상이 있는 절벽이라는 의미로 가릉강가에 있는 절벽을 따라 북위 후기에서 수, 당, 송, 원, 명, 청시기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곳이다. 현재 길이 388미터, 높이 45미터의 절벽에 950의 불감..

中/사천 답사 2021.08.03

사천석굴탕방기 - 3일 안악 안악석굴安岳石窟 와불원卧佛院2

이제 다른 쪽 석굴을 보러 간다 이렇게 곳곳에 크고 작은 석굴이 있다 불상들은 손상이 심한 편이다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대부분 당나라 것이라고 낮은 절벽을 가득 매운 석불 반가상이다 훼손이 심해 명호를 알긴 어렵다 전경 풍화가 많이 진행된 듯 연이어 있는 삼존불 경당 혹은 부도로 보이는 조각도 있다 이제 위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길에도 석굴이 보인다 현지인의 안내로는 승려들의 생활 공간이라고 불상은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동굴 이곳에 온 목적은 바로 이곳 15개의 석각 불경동 때문이다 절벽을 파서 15개의 방을 만들어 그곳에 40만자 이상의 불경 22부를 새겼다. 들어간다 입구의 여래입상 벽면의 거대한 경당 조각 엄청나게 섬세하고 아름답다 석당 옥새거 이상의 조각 생령좌 사천왕 등이 새겨진 대석 안타깝게 ..

中/사천 답사 2021.08.02

滿步記 - 1일 도착

늦은 답사기지만 중국 동북지역 답사기를 올린다. 중간까지는 여행사와 함께 심양부터는 혼자 움직이는 일정 연길로 떠나는 길 북경이 아닌 중국은 오랜만이다 날이 좀 흐린 편 길지 않은 시간의 비행을 통해 연길로 연길 도착 5월이지만 조금 쌀쌀하다 처음 보는 만주의 풍경 현재 중국에서는 만주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만주라는 단어가 워낙 익숙하기에 그대로 사용한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 카메라 조작을 잘못해서 몇장이 어둡게 나왔다 변경도시 수려연변 연변조선족자치구임을 알리는 간판 짐을 찾는 곳. 백두산 근처에 장백산 공항이 생겨서 70위안이면 갈 수 있다고 세관을 지난다 밖으로 나오니 식당에 조선족전통민속음식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연길 공항 내부 공항 외부 한글이 같이 붙여 있는 공항 현판 아래 ..

사천석굴탕방기 - 3일 안악 안악석굴安岳石窟 와불원卧佛院1

이제 안악에서의 마지막 장소인 와불원으로 간다 주차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있다 주변은 완전 시골 밭을 따라 걷다보면 무덤들이 등장한다 여기저기 무덤들이 많다 밤에 오면 으스스할 듯 드디어 보이는 와불원 입구 지키는 사람도 없이 한적하다 관리사무소 한켠에 있는 불상 최근 만든건지 오래된 불상을 옮겨놓은 건지 잘 모르겠다 마침내 펼쳐진 와불의 자체 작은 연못을 사이에 두고 와불이 있는 북암과 석굴들이 많은 남암이 마주보고 있다. 안악석굴(安岳石窟) 와불원(卧佛院)은 안악석굴 중에서도 시대가 올라가는 불상들로 당~북송 시기의 것으로 주로 당나라 때의 것이 많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북송때까지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한참은 잊혀져 있으며 민간에서는 신앙했던 것 같으나 당국에 알려진 것은 1982년 ..

中/사천 답사 2021.07.30

사천석굴탕방기 - 3일 안악 안악석굴安岳石窟 원각동圓覺洞2

남암으로 가는데 그 사이 절벽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귀학이라는 글자로 당나라 말에 새긴 것이라고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방생지라고 한다. 안내문 높이 1미터가 넘는 큰 각자이다 이제 남암으로 간다 남암의 모습 북암보다 시대는 오래되었지만 풍화에 의한 훼손이 더 심한 편이다 당말~오대의 불상들 이렇게 낮은 곳에 모여있다 석굴 전경 불두의 훼손은 일부러 그렇게 된 것 같다 채색도 비교적 잘 남았다 아마 석가와 보현, 문수를 모시고 십육나한 등을 모신 것 같은데 본존 좌우에 사자와 코끼리로 추정되는 동물을 타고 있는 보살들 문혁인가? 구석에 숨어 잇는 작은 오존불 남암은 대체적으로 해가 잘 안들고 습기가 많아 이끼 등이 많이 있다. 언덕 위로 거대한 거북이가 보인다 후대에 조각한 것이라고 그 옆 절벽 ..

中/사천 답사 2021.07.28

사천석굴탕방기 - 3일 안악 안악석굴安岳石窟 원각동圓覺洞1

이번에 온 곳은 안악석굴 중 가장 유명한 원각동이다 입구부터 화표며 석등이며 요란하다 근래 개발되는 중국 관광지가 다 이 모양 거대한 입구 돌로 만든 패루 굳이 왜 이렇게까지... 저 위로 계단이 보인다 원각동이라는 현판이 금색으로 박혀있다. 원각동 경내도. 석굴뿐만 아니라 근대 유적이나 도교 사원까지 같이 결합된 꽤나 복잡하고 큰 여유경구이다. 안안석굴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비로동과 함께 사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곳 원각동(圓覺洞)은 당에서부터 오대를 거쳐 북송시기까지 주로 조성된 석굴이다. 북암과 남암 두 절벽에 총 1933구의 불상이 있으며 그중 북암의 원각경을 주제로 조성한 원각동이 가장 유명해 전체를 원각동이라고 불린다. 특히 북송시대의 명작들이 주로 포진해있다. 올라가는 길 안악석굴의 유..

中/사천 답사 2021.07.21

사천석굴탕방기 - 3일 안악 안악석굴安岳石窟 천불채千佛寨2

이제 다음 불상을 보러 간다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당나라 시대의 삼존불이다. 당나라 불상을 기본으로 좌우에 북송대 불상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높이가 꽤 된다 아미타삼존으로 보인다 천정 일부가 붕괴 측면 벽에 있는 조각상 작지만 꽤 정교한 조각들이다 네모낳게 얼굴을 파간 건 아마 도굴꾼들의 짓 같다 우협시보살 본존 아미타여래 우협시보살 손의 표현 연화대좌 상호를 보이 아까 후대의 보작이라고 하던 것도 보작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광배는 얕게 파서 채색했다 좌협시 상호 우협시 상호 송나라 때 추가한 것으로 보이는 삼존불 희미한데 관음보살 하나는 잘 남았다 풍화가 많이 된 협시보살 북송대로 추정 반대편 여기는 승려, 보살, 역사상이 잘 남아있다 절벽 위의 불상 여래와 보살이 나란히 서 있고 작은 보살..

中/사천 답사 2021.07.21

사천석굴탕방기 - 3일 안악 안악석굴安岳石窟 천불채千佛寨1

오늘 갈 곳이 많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난다 호텔을 떠나 안악석굴을 구성하는 또 다른 곳인 천불채(千佛寨)는 계곡을 따라 삼천여구의 불상이 빼곡하게 들어선 곳이다. 본래 당나라 때 세워진 서암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이후 청나라 때 천불사로 바뀌어 전해졌으나 1974년 정신병자의 방화로 사찰은 소실되고 석불만 남았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석불은 수나라 때의 것이고 이후 당과 북송, 남송에 이르기까지 조각되었다 .물론 명청대에 추가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수~남송대의 것이다. 105개의 석굴이 있으며 그 밖에 노상에 조각된 것도 많다. 안악석굴의 일부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채 경내도 생각보다 꽤 크다 전체는 공원처럼 되어 있다 바위 일부를 탑처럼 깎았다 옛날 무덤의 흔적 보호하면서 철거..

中/사천 답사 2021.07.20

사천석굴탕방기 - 2일 안악 안악석굴安岳石窟 화엄동華嚴洞

화엄동 가는 길 가는 길의 절벽들 좀 음산하다 절벽 위의 집. 개가 처다본다 아직 중국의 70프로는 이런 곳에서 사는 듯 드디어 보이는 화엄동 입구 입구로 들어간다 화엄동 입구 안악석굴(安岳石窟)의 하나인 화엄동(華嚴洞)은 북송~남송 연간에 조성된 석굴이다. 총 159구의 불상과 24구의 석각, 비석이 있다. 이름처럼 내부에 화엄경의 모습을 변상도처럼 조각한 큰 화엄동이 있으며 그 옆에 비교적 작은 굴인 대반야동이 있다. 한동안 잊혀진 석굴로 민간 신앙의 대상이었다가 중일전쟁기에는 중국군 장군의 집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고궁박물원의 보물 일부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신중국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입장료는 12위안 석굴로 올라가는 계단 전국중점문물보..

中/사천 답사 2021.07.19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6 - 총설6

명기와 사카이슈(堺衆) 무로마치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즈미(泉州) 사카이(堺)는 간사이에서 유일한 항구로써, 국내외의 물화가 폭주하는 번화한 도시였다. 당시 아시카가씨(足利氏)와 기타 상류층 계급이 대륙 및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부터 명기와 진귀한 물산을 수입하는 관문으로써, 나야(納屋), 아부라야(油屋), 텐노지야(天王寺屋), 타이시야(太子屋) 등으로 일컬어지는 대상인(豪家軒)들이 즐비하여으며 이들 사카이 상인들은 사카이슈(堺衆)라고 불렸다. 천하를 거머쥔 명장(名將)들은 군사적 목적으로 부호들과 경제적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했으므로, 결코 이들은 사카이슈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 사카이슈는 외국과 일본 간 통교의 요로(要路)에 있어, 가장 먼저 최신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위..

雜/대정명기감 2021.07.04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5 - 총설5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명기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尾張)에서 굴기하여 천하통일의 업을 창출하였고, 이마가와(今川),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고 아자이(浅井), 아사쿠라(朝倉)를 섬멸하여 먼저 교토를 세력권에 집어넣었다. 공격 방향이 더욱더 퍼질수록 용맹한 장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점점 급해졌지만, 당시 조정의 지위와 명작에 맡겨서는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하였고, 그들에게 있어 사력을 다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토지와 금은재보 등 물질적 상여(賞與) 뿐이었으나. 충분히 주기에 토지는 이미 부족하였고 금은도 역시 한계이 있었다. 시무(時務)에 민첩하고 능통한 노부나가는 빠르게도 근방의 소식을 알아차리고 히가시야마어물(東山御物)을 시작으로 하여 킨키(近畿) 지방에 산재한 천하명기를 자기 손에 넣은..

雜/대정명기감 2021.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