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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 주전자와 사철에 대한 환상

무쇠 주전자와 사철에 대한 환상 한국에 보이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보이차 가격도 급격히 올랐지만 더불어서 몸값이 올라간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보이차을 낼 물을 끓이는 무쇠 주전자입니다.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무쇠 주전자(일본에서는 鐵甁이라고 부르는)는 그 물 맛이 좋고, 특히 뚜껑에 龍文堂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거나, 南部鐵器 마크를 달고 있거나, 砂鐵(일본어로 和鐵)로 만들어 진 것이 최고라는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에만 퍼져있는 이야기는 아닌지, 중국에서도 이런 물건들을 선호하는 현상이 보입니다. 무쇠 주전자에 대한 신화는 일본에도 역수출 되어서 일본식 다도를 위한 다부(茶釜)에도 사철을 썼다는 이야기가 많고, 야후 옥션에서 이런 철기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올..

雜/무제 2019.03.17

노무현과 그의 시대2 - 정의당을 지지하는 이유

노무현과 그의 시대2 - 정의당을 지지하는 이유 저번에 올린 글에 이어 다시 말하지만 노무현과 그의 시대는 결코 '진보적' 시대가 아니었다. 잘 생각해보자. 지금은 당연하게 사용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어가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것이 과연 언제인가? 바로 참여정부 시절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이루어진 수 많은 신자유주의 정책은 결국 이명박-박근혜 정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이명박 정권 초기 모두가 넘어갔지만 한미FTA 반대 집회에서 정동영이 스스로 죄를 인정해야 했을 정도로 참여정부는 철저한 신자유주의 정권이었다. 고백하건데 그땐 심지어 한나라당이 진보적이어 보일 정도였다. 물론 지난 9년 동안 운동진영의 구호에서 신자유주의라는 구호가 다소 희미해진 것은 우리가 경제적 불평등을 외칠 형식적 정치..

나는 기억한다. 노무현과 그의 시대를.

나는 기억한다. 노무현과 그의 시대를.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는 고2였다. 처음으로 보는 개혁적 대통령의 모습에 나와 친구들은 열광했고, 그 다음해 탄핵을 거치며 그에 대한 기대와 지지는 더해갔다. 바로 그 때 노동자대회에서 이윤석열사가 제 몸에 불을 지르며 산화할 때 나는 노사모에 가입했고 노무현에 열광했다.대학에 입학했더니 가장 먼저 본 것은 김주익을 부르짖으며 우는 김진숙 위원의 영상이었다. 대학에 입학했더니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부산 신선대 부두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한미FTA와 쌀개방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에게 영하 10도의 날씨에 물대포를 쏘았고, 앞에서 사수대를 하던 선배의 잠바는 그대로 얼어붙어 서로 앉아줘야 했다. 허세욱 열사의 죽음에 더 이상 죽음을 무기로 삼지 말라던... 노무..

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 -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의 구속에 부쳐

(오늘보다 25호 투고)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의 구속에 부쳐 박세연(한국사 연구노동자) 얼마 전 전공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가 북한 학자의 논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렵게 열람할 기회가 있었다. 신분증 제출은 물론이고 서약서까지 쓰고 본 그 논문은 그러나 실망을 넘어 북한 학계의 수준이 이 정도인가 하는 놀라움이 들만큼 초라했다. 북한의 유일한 역사 학술지에 실린 그 논문은 정권에서 원하는 이야기를 시대만 바꾸어 서술하고 있는데 불과했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결과였다.해방 전후에 이름을 날렸던 비판적 지식인들은 남한의 반공주의를 견디지 못하고 상당수 월북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까지 적어도 한국사 영역에서 북한에는 백남운을 비롯한 유수의 연구자가 탁월한 ..

운동권 (하위)문화에 대한 간단한 소회

이제는 잘 기억도 안나는... 2009년 고대 동연을 할 때 민중가요 악보집을 만든 적이 있었다. 당시 민중가요 노래집 생산이 거의 사라지고 있을 때였다. 전남대 교지편집위원회에서 라는 노래집을 매년 내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여러가지 예산이나 인력 문제도 업데이트가 늦었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라는 민중가요 악보집을 내고 있었지만 그건 사료로의 성격이 강했고, 연도순으로 노래가 정리되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불려지는 노래들이 실리기에는 너무 요원했다. 관악에서는 여남이 평등하기 위한 민중가요 노래집이 나왔고 남성 옥타부 위주의 민중가요 악보를 상당수 고치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여성과 남성이 모두 부르기 애매한 옥타브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2년 동안 노래를 모으고 모아서 노래의 대중성과 역사성, ..

雜/무제 2016.10.22

안암동 노포(老鋪)2 - 사라진 곳

안암동 노포(老鋪)2 - 사라진 곳 가인언제나 3차는 가인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그 가파른 계단은 술먹고 구르면 군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렇게 기어올라가면 어두컴컴한 조명에 늘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가인이 있었다. 언제나 젊게 사시는 누님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항상 그랬듯이 누가 정하지도 않았지만 삼천에 화채를 시켰다. 좀 돈이 많은 날은 아무거나를 시키기도 하였다. 심지어 양주라도 얻은 날이면 그것을 그대로 들고가서 얼음이랑 안주만 시켜도 누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인은 새벽 2시가 넘어서 가야 제맛이었다. 2차 쯤 해서 모두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 지금 생각하면 물을 탄 것 같던 맥주를 들이키며 김광석의 노래를 흘엉거리다가 이등병의 편지라도 나오는 날이면 남자들은 모두 ..

근황 15.06.11

근황 15.06.11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지고 있던 짐을 벗어던지고 사가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니 어안이 벙벙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합니다.교토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아름다운가요? 닌나지의 어전에서 바라보는 오층탑의 아직도 그대로 아름다운가요? 그 앞의 맛있는 덮밥집도 그대로겠지요? 도지인의 아침 안개 낀 정원이 그립습니다. 도지인역에서 도지인까지 타박타박 걸어가던 그 길도 그립습니다. 후시미의 누룩 냄새와 메이지 천황릉까지 이어지던 긴 전나무길도 기억납니다. 로잔지의 도라지꽃도 단잔신사의 수국도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히메지성에 가득 피었을 사쿠라도 그립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당분간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아 생각해보면 저는 박사과정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

안암동 노포(老鋪)1 - 남아있는 곳

안암동 노포(老鋪)1 안암동에 드나든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대학와서 배운 것의 5할은 술이고, 4할은 데모질이고 1할은 결석이었다. 등록금을 내고도 서관에 가지 않은 날이 더 많았고 수업은 안가도 술자리만큼을 꼭꼭 챙겨가던 때가 있었다. 2학년 때던가 저녁 6시에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을 때 집에 가야한다는게 너무 낯설어서 기어이 선배들을 불러내 술을 먹었던게 어제 같은데 그동안 너무 많은 가게가 생기고 또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간다는 걸 너무 잘 알려주는 것이 식당와 술집이 생기고 망하는 것이다. 일본에 가면 곧곧에 있는 것이 대를 이어 하는 오래된 가게, 즉 노포(老鋪)이다. 언제가도 그 자리에 있는 가게들이 너무 부럽다. 누구 말처럼 음식은 맛이 아니라 누구와 먹었는가의 그 추억으로 남는 것..

아플 수 있어서 청춘이다.

아플 수 있어서 청춘이다. 1. 대학에 들어와서 2008년까지 학사경고를 2번 받았다. 대학에 입학하니 운동권 선배들이 있었고, 나는 매일 술을 먹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한총련도 있었고 5월이면 여기저기서 대학생들의 커다란 데모판도 있었다. 약간의 중2병과 소영웅주의에 빠져 있던 나를 선배들은 학회에 데려가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물리적인 폭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술을 먹였다.그렇게 나는 대학사회에서 완전히 개조되었다. 자신이 중산층인줄 착각하는 서민층들이 모여사는 작은 동네에서 공부 깨나 했다고 폼을 재던 어린애는 수업을 밥먹듯이 빠졌다. 점심부터 낮술하느라 빠졌고, 데모가느라 빠졌고, 학회 세미나 커리를 못읽어서 빠졌고, 선배들이랑 얘기하다가 빠졌고, 날씨가 좋아 빠졌고, 날씨가 나..

雜/무제 2015.01.02

역사학에 관한 메모2

1. 자본주의 맹아론에 기반한 내재적발전론이 붕괴된 이후 조선시대 사회의 구조를 읽는 뚜렷한 독법이 사라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포스트모던-포스트콜러니얼 담론이 역사학에 들어온 지 꽤 오래되고 연구성과도 꽤나 축적되었으나 아직 조선시대를 설명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개발되지는 않았다.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재기되고는 있지만 최근 재출된 '유교 근대화론'에서 잘 보이듯이 그것은 서구적 근대 대신 다른 근대를 설정함으로써 조선사회에서 '근대성'을 검출해내려는 시도이다. 여전히 '근대'라는 지향점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유교 근대화론은 사실 내재적발전론의 또다른 변주에 불과하다. 2. 중요한 점은 근대에 부과된 부당한 긍정성 내지 환상을 기각하는 것이다. 서구적 근대가 우리에..

역사학에 대한 메모

1. 먼저 태어나서 입학했다는 이유로 가끔씩 자신의 뜻은 학문에 있음을 어필하는 친구들을 만나곤 한다. 공부를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유쾌한 일이지만 동시에 걱정이 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래서 어떤 시대를 전공하고 싶냐는 질문에 “~시대가 재밌는 것 같아서..” 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오면 더욱 더 한숨이 나오게 된다. 만약 그런 대답을 하는 친구가 학부 1~2학년 이라면 관계가 없지만 대학원 진학을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3~4학년이라면 꽤나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흥미와 재미는 연구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일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교양·상식으로서의 역사와 분과학문으로서의 역사학, 그리고 인간의 삶이 구성하는 보편적인 그 무엇으로서의 역사를 구분해야 한다. 적어도 분과학문으..

부활 - 김규항

부활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끝이 없다. 기독교도들은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며 굳세게 예수의 부활을 주장한다. 반면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불신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역사 속에 실재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인 일은 예수가 잡히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예수가 부활했다!'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달라진 모습 사이에 예수의 부활 사건이 있다.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부활이 무엇인가다. 예수의 부활을 둘러싼 모든 주장과 논란은 예수의 부활이 육체의 부활, 즉 예수의 죽은 세포들이 재생한 사..

雜/남의 글 2014.01.10

석사로 가는 길 10 - 심사본

17세기 ~ 18세기 전반 僧軍의 확대와 調發방식의 변화 高麗大學校 文科大學韓國史學科 박 세 연 2013年 12月 5日 目 次 머리말 1 1. 17세기 전반 국가의 僧軍 활용과 調發 6 1)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승군 활용6 2) 總攝을 통한 간접적 승군 조발17 2. 17세기 후반 義僧役의 시행과 僧軍 調發 방식의 변화 24 1) 孝宗代 南漢山城의 정비와 義僧役의 시행 24 2) 국가의 직접적 義僧 조발 방식의 성립34 3) 度牒 발급의 중단과 僧帖의 등장42 3. 18세기 전반 방어체제의 변화와 地方 僧軍의 확대 50 1) 지방 방어체제의 정비와 山城의 증가50 2) 地方 僧軍의 확대와 義僧防番錢制의 시행57 결론64 참고문헌67부록․74 머리말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겪은 17세기의 조선은 여..

석사로 가는 길 9 - 석사학위 예비발표문

17세기~18세기 초 僧軍의 확대와 승려 調發방식의 변화 석사수료박세연 緖論1. 17세기 전반 국가의 승군 활용 1) 임진왜란 이후 승역의 확대 2) 17세기 전반 摠攝을 통한 간접적 승군 조발2. 17세기 후반 의승역의 시행과 승려 조발 방식의 변화 1) 효종대 南漢山城의 정비와 義僧役의 시행 2) 17세기 후반 국가의 직접적 의승 조발 방식의 성립3. 18세기 초 방어체제의 변화와 지방 승군의 확대結論 緖論조선은 성리학의 이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유교국가였다. 조선은 국가통치의 바탕 이념을 성리학으로 삼았으며, 사회구조 자체를 유교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다른 종교와 신앙은 異端으로 지목되고 교화와 파타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신앙되어온 불교는 성리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