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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데라(長谷寺) 예찬

하세데라(長谷寺) 예찬 내가 하세데라에 도착한 것은 2012년의 초가을이었다. 혼자 그곳을 찾았다. 아직 여름의 더위가 가시지 않고 가을의 정서가 완벽하지 않던 때였다. 일본의 여름이 한반도의 그것보다 다소 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직 여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그 날 일정은 이랬다. 새벽부터 부슬거리는 비를 뚫고서 JR을 타고 호류지(法隆寺)에 갔다가 근처의 호린지(法輪寺)와 호키지(法起寺)로 행했다. 호키지 앞에서 야마토코리야마(大和郡山)로 향하는 버스를 타는데 무려 한시간 반이나 기다려야했다. 야마토코리야마에서 우네비고료마에역으로 가서 나라현립 가시하라고고학연구소의 부속 박물관을 보고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이 내려온 곳이라는 가시하라신궁에 가기로 하였다. 거기서 나는 나라 남부의 아주 ..

도(道)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예전에 논어를 읽을 때는 아침과 저녁 사이를 단지 짧은 시간의 단위로만 해석하여 "진리를 알게 된다면 바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 정도로 해석했다. 참 공자는 도에 목말라 있구나 정도로... 그런데 최근에 의문이 들었다.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목표라면 어째서 도를 들은 아침에 바로 죽지 않는가? 굳이 저녁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아침과 저녁 사이 해가 떠서 지는 그 사이의 시간은 바로 도의 실천을 위한 시간이다. 아무리 대단한 진리를 들어도 그것이 진정 적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 속에 있는 일말의 작은 의혹도 없이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

독서이력서

독서 이력서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은 식상하지만 사실이다. 한 사람의 신체는 무엇을 얼마나 먹고 자랐느냐에 (절대적이진 않을지라도) 좌우되듯이 한 사람의 사고는 무엇을 얼마나 읽고 자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아주 어릴 적에 읽었던 책이 의외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태어나서 처음 꽂힌 것은 선풍기였는데 선풍기 날개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식겁한 후로는 책에 꽂혔다고 한다. 내 기억에도 자기 전에 엄마 아빠나 이모에게 동화책 읽어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난다. 꽤나 성가신 아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아이가 읽을 만한 책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러 교회로, 또 같은 동네 살던 아는 형의 집으로 전전..

동행이인(同行二人)

일본 시코쿠에 가면 홍법(고코)대사 공해(구카이)의 흔적을 따라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오헨로미치라는 순례길이 있다. 순례자들의 복장은 똑같은데 몸에는 수의를 대신하는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관을 대신해 얼굴을 가려줄 삿갓을 쓰고, 손에는 묘비를 대신할 지팡이를 집고 다닌다. 순례 도중 죽을수도 있는 고독의 길, 실제로 많은 이들이 순례 도중 죽기 때문에, 혹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 깨문에 언제든지 죽어도 될 준비를 하고 걷는 죽음의 길이다. 혼자 걸을 수 밖에 없는 1200km의 그 길을 사람들은 군데군데 놓인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는 표지를 보며 힘을 내고 걷는 다고 한다. 고독의 길을 무형의 동반자를 통해 이겨내는 것이다. 그 동반자는 부처님일 수도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가족일..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종교학에서 신을 신앙하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력신앙이고 또 하나는 타력신앙이다. 자력신앙이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신과 동등한 혹은 신에 근접한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앙이다. 반면 타력신앙은 신의 능력과 도움을 통해 어떠한 단계 이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자력과 타력신앙 모두 단순한 소원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종교적 사상적 수준의 달성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기복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타력신앙이 강조되어온 반면, 아시아적 전통에서는 자력신앙이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인도의 힌두신앙은 수행을 통해 신과 비슷한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중국의 유교 역시 수신을 통해 성현(聖賢)이라는..

늦봄

늦봄 꽃이 졌습니다. 지난 봄 세상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꽃잎은 모두 흩날려서 사라지고 이제 제법 더운 기가 느껴집니다. 그래도 아직 밤에는 선선하여 술을 마시기 적당하고, 가시지 않은 봄 향기가 코끝을 맴돕니다. 늦봄입니다. 책 읽기 좋고, 생각하기 좋고, 술 마시기 좋은 날이니 왜 문익환 목사님이 자신을 늦봄이라고 불러 주길 바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한 때는 봄을 좋아했습니다. 중춘(仲春)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합니다. 겨울동안 숨죽였던 식물과 동물이 저마다 세상으로 나오고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려는 시기가 바로 중춘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색깔과 향기를 총동원합니다. 이 들뜬 축제와 같은 시기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봄은 짧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만약..

행복

행복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일부러' 선택하는 것이다.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 그리고 이루고 난 뒤에 얻는 작은 성과가 행복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산 결과가 행복인 것이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한동안 괴로워야 한다. 그 속에서 가치를 찾을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인과율이다. 어떠한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는 다른 것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해지려는 것을 우리는 도둑놈이라고 한다. 노동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씨 뿌리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고통스러워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잠시 고민을 놓고 사는 것. 아니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잠시 고민을 놓고 살거나 하고 싶은대로만 하고 살수도 있지만 그것이 삶에..

유서. 2013.05

유 서 인간의 역사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지만 삶과 죽음만은 예상치 못한 우연입니다. 저 역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방식으로 삶을 마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의 죽음 이후에 남아있는 일만은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렇게 유서를 남깁니다. 만일 제가 사고로 혹은 병이나 선택으로 삶을 마친다면 유서 원본은 제 후배 유제훈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제 마지막 가는 길은 제훈이가 정리해주면 좋겠습니다. 이 유서는 2013년 5월 작성되었으며 상황에 따라 수정될 것입니다.따로 벌어놓은 재산이 없기 때문에 딱히 드릴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진 경제적 채무는 부모님께 부탁드리기 바랍니다. 그 정도의 경제적 능력은 있을 것입니다...

雜/무제 2013.05.11

한국사대동반 후배들에게

한국사대동반 후배들에게 새벽에 적는다. 나는 참 못난 선배이다. 9년 동안이나 학교를 맴돌면서 만난 후배만 200명이 넘지만 고학번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은 거의 없고 후배들에게 신세지기 일쑤다. 가끔은 내가 보기도 한심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한국사대동반이라는 낯선 공간에 들어왔을 너희가 저 늙은이를 봤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까?다만 내가 한 가지 노력했던 것은 권위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너희보다 나이가 많고 학교에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로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내가 골목대장 놀이에 심취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저 쉬운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 선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너희에게 미안한 점이 너무나 많다. 한국사반은 약간 이상한 곳이다. 이상하다..

요한에게 (겟세마네에서)

요한에게 밤은 지독히 검었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있었던 끝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했고 너는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로가 침묵하면서 밤은 더욱 깊어졌고 나는 계속 슬픔의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내 고독의 십자가를 같이 질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너는 최후의 만찬에서 내 품에 기대어 앉은 젋은 요한이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묻고 싶을 때 너를 통했다. 너는 나에게 자랑이고 희망이었다. 베드로조차 너에게 미치지 못했다. 나는 너에게 새 예루살렘 왕국에 대해서 설명해주었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너는 나를 사람의 아들로 믿었다. 아니 적어도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스가리옷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컴퓨터로 논문을 쓰거나 사료를 볼 때 작은 볼륨으로 음악을 틀어놓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OST가 재생되었고, 회한에 젖어 2시간 동안 전곡을 다 듣게 되었다. 2003년 런던에서 녹음된 음반은 여러 번 무대에 올려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중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것 같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역사적 예수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 교회의 해석에 갖힌 예수가 아니라 지역적 차별에 시달리던 나사렛에서 자라고 공부라고는 해본 적 없는 어부를 들어 제자를 삼은 청년 여호수아를 좋아한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성노동자, 민족반역자인 세리에게 세상을 사는 가치를 알게 해준 예수를 좋아한다. 그리고 가나의 결혼식장에서 술을 만들어내어 함께 마시고, 위선자와 지식인..

봄비가 내려서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려졌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데 창 밖 가로등의 불빛이 비에 막혀 반은 망막에 닿고 반은 세상으로 흩어진다. 안개비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닫고 향불을 태운다. 향은 유교와 불교 의식에서 모두 올리는 것이지만 의미가 사뭇 다르다. 유교에서 향의 연기는 신이 내려오는 길이다. 향의 연기는 중력을 거슬러 하늘에 닿는다. 그 연기를 타고 신이 내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향을 함부로 태우지도 않고 또 그 향기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불교에서 올리는 향은 다르다. 향은 등, 꽃, 정수, 곡식과 함께 부처님께 올리는 다섯가지 아름다운 공양 중 하나이다. 향불은 연기를 남기고 연기는 향과 함께 공중에 퍼진다. 향은 실체가 없지만 동시에 공간을 가득 채우는 힘을..

기억

가끔씩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문장이 필요했다. 그럴 때면 학교 바로 밖에 있는 동방서적에 달려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2번째 줄에 있는 서가의 중간 쯤 되는 칸을 뒤졌다. 거기에는 시집이 있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한테 5000원 남짓한 시집은 밥 한끼 값으로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호사였다. 실천문학사,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사, 민음사, 미래사에서 나온 한국 대표 시인 100인선... 출판사 별로 꽂혀있는 시집들 사이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하면 시인을 찾았다. 김남주, 함민복, 박노해, 박영근, 김용택, 도종환, 신경림, 이용악, 이성부, 이문재, 정호승, 한하운, 브레히트, 엘뤼아르, 네루다... 때로 운이 좋아 쿠폰을 많이 모으면 작은 시집 하나 정도는 손 쉽게 가질 수 있었..

근황 13.04.18

근황 13.04.18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봄이라서 어쩐지 설레이는 나날입니다. 요즘 월요일마다 서울대 규장각으로 출근을 합니다. 아침에 고등학생, 대학생의 무리에 섞여 출근을 하고, 오전부터 오후까지 자료를 봅니다. 날이 좋고 해가 길어 여섯시가 좀 못되어 일이 끝나도 시야가 밝습니다. 일을 마치면 긴 시간에 걸쳐 안암으로 돌아옵니다. 일이 끝나면 서울대 행정관 앞에서 버스를 타고 노량진역으로 향합니다. 버스는 행정관을 출발해 정문을 지나 신림천을 따라 굽이굽이 난 도로를 따라 달립니다. 그러다가 보라매공원 쪽으로 방향을 틀어 노량진역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내려 버스를 갈아탑니다. 버스는 다시 한강대교와 노들섬을 지나 용산을 거쳐 서울역과 남대문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을지로를 지나쳐 동묘앞을 지납..

근황 13.04.13

근황 13. 04. 13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마음이 편한 나날입니다. 이제야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제 하려는 이야기를 마음 편하게 하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한달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시간만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나브로 다소 마음이 진정되고 이제는 새로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처음 논문 발표를 한 학기 미루기로 결정했을때 겉으로는 담담한 척 했지만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제 선택이었지만 그 동안의 힘든 생활을 지탱했던 끈이 끊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터널의 저 편에 보이는 빛이 끝인 줄 알고 달려왔는데 실은 가로등이었고 바깥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쬐고 싶다는 희망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