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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상나라에 태갑(太甲)과 이윤(伊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윤은 상나라를 세운 탕을 도운 명 재상이었고, 태갑은 탕의 손자로 상의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태갑은 왕위에 올라 포학하게 굴고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결국 개국공신이었던 이윤은 태갑을 동궁(桐宮)에 감금하고 3년 동안 섭정하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이윤은 반성한 태갑을 다시 불러 천자의 자리에 다시 올렸고 태갑은 이윤에게 절하며 감사를 표한다. 이 이야기는 서경에 실려있다. 보통 태갑과 이윤의 이야기는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유교사회에서 신하가 임금을 훈계하는 내용으로 숱하게 재생산되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윤이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은 없었다. 이윤은 상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재상이며 태갑을 어릴 때부터 ..

도쿄의 호리코시 지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는 15년의 도피 끝에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은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를 지켜보고 쓴 저서의 부제를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고 붙였다. 그녀는 자신은 다만 상부의 지시에 따랗을 뿐이라고 주장했던 아이히만을 보면서 그에게 부당한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수행한 죄목을 물었다. 아이히만은 충실한 군인, 착한 아버지, 독실한 신자였지만 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악인과 선인을 칼로 무 자르듯이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다. 오히려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악은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작품 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그 애니매이션은 제로센의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일생을 소재로 삼고..

사문난적 8월 특강

사문난적에서 합숙 대신 1주일 간 8월 특강을 진행합니다. 목표는 동양사상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지식을 쌓는 것입니다. 사문난적 학회원들 외에 아무나 들어오셔도 관계 없습니다. 매 강은, 준비한 텍스트를 같이 읽고 설명을 진행하고 질의,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1강당 시간은 2시간~2시간 반으로 예상됩니다. 주제 : 동양사상과 인문학 1강: 동양사상의 탄생과 제자백가 시,서,역경의 탄생과 유학의 탄생, 묵가, 법가, 도가, 양주, 장자, 관중. 유학의 승리와 동양적 公私관념 2강: 유학과 신유학, 그리고 오늘의 유학 -순자와 맹자, 한당유학과 송대 신유학, 그리고 명대의 양명학과 청대의 고증학, 마지막으로 조선성리학과 유교근대화론 3강: 불교의 전래와 정착 원시불교의 탄생과 분열. 교학불교의 성장..

광주의 정신, 민주주의의 정신 - 김규항

광주의 정신, 민주주의의 정신 (2005년 5월 18일 연세대 강연문. 다시 5월.. 함께 읽어주시길.) 얼굴은 본적이 없지만 이따금 이메일을 교환하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얼마 전에 광주항쟁에 대해 잘 모르니 알 수 있는 책이나 사이트를 소개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좀 의외였습니다. 그는 요즘치곤 꽤 반듯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는 대학생인데 어떻게 광주를 모를까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지금 대학생이면 1980년엔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어린아이였으니 말입니다. 당시 고3이었고 청년 시절 내내 광주를 품고 살았던 저희 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저와 비슷한 세대이면서 광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태”라고 할 때는..

雜/남의 글 2013.06.30

박제인가 희망인가 - 김규항

박제인가 희망인가 ‘일베’라는 곳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을 심각하게 왜곡·폄훼하고 심지어 희생자들 사진을 음식에까지 비유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일베의 행태에 분노하는 건 시민의 상식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한 분노에 머물러선 안된다. 일베에 분노하며 일베만큼만 생각해선 안된다. 역사는 악의에 의해서만 왜곡되는 게 아니라 게으른 선의에 의해서 더 많이 왜곡된다. 역사 속에서 저항적 사건은 대개 처음엔 체제에 의해 금지되거나 불온시되면서 일부 저항세력에게서만 존중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존중은 일반화하고 공식화한다. 물론 그 사회가 느리게라도 진보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일부의 존중이 일반적이고 공식적 존중으로 변화함으로써 그 사건은 명예를 회복한다. 그..

雜/남의 글 2013.06.30

왼쪽의 힘 - 김규항

왼쪽의 힘 오랜 만에 쇼스타코비치 5번을 꺼내 듣다 현실 사회주의 생각을 했다. ‘인민의 주인인 나라’를 표방하다가 인민에 의해 무너진 사회.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채만수처럼 ‘스탈린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소련이 미국보다 못한 사회였는가’라며 결기를 보이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한때 현실 사회주의의 전도사였고 여전히 만날 맑스주의를 말하면서도 현실적 결론은 ‘안철수처럼 어눌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인 이아무개까진 아니더라도 나같은 80년대 운동권들은 대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굴절된 비굴함이 있다. 그 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한껏 경도되었던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과, 낡고 비현실적인 좌파로 보이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비굴함. 386의..

雜/남의 글 2013.06.30

하세데라(長谷寺) 예찬

하세데라(長谷寺) 예찬 내가 하세데라에 도착한 것은 2012년의 초가을이었다. 혼자 그곳을 찾았다. 아직 여름의 더위가 가시지 않고 가을의 정서가 완벽하지 않던 때였다. 일본의 여름이 한반도의 그것보다 다소 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직 여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그 날 일정은 이랬다. 새벽부터 부슬거리는 비를 뚫고서 JR을 타고 호류지(法隆寺)에 갔다가 근처의 호린지(法輪寺)와 호키지(法起寺)로 행했다. 호키지 앞에서 야마토코리야마(大和郡山)로 향하는 버스를 타는데 무려 한시간 반이나 기다려야했다. 야마토코리야마에서 우네비고료마에역으로 가서 나라현립 가시하라고고학연구소의 부속 박물관을 보고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이 내려온 곳이라는 가시하라신궁에 가기로 하였다. 거기서 나는 나라 남부의 아주 ..

도(道)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예전에 논어를 읽을 때는 아침과 저녁 사이를 단지 짧은 시간의 단위로만 해석하여 "진리를 알게 된다면 바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 정도로 해석했다. 참 공자는 도에 목말라 있구나 정도로... 그런데 최근에 의문이 들었다.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목표라면 어째서 도를 들은 아침에 바로 죽지 않는가? 굳이 저녁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아침과 저녁 사이 해가 떠서 지는 그 사이의 시간은 바로 도의 실천을 위한 시간이다. 아무리 대단한 진리를 들어도 그것이 진정 적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 속에 있는 일말의 작은 의혹도 없이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

독서이력서

독서 이력서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은 식상하지만 사실이다. 한 사람의 신체는 무엇을 얼마나 먹고 자랐느냐에 (절대적이진 않을지라도) 좌우되듯이 한 사람의 사고는 무엇을 얼마나 읽고 자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아주 어릴 적에 읽었던 책이 의외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태어나서 처음 꽂힌 것은 선풍기였는데 선풍기 날개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식겁한 후로는 책에 꽂혔다고 한다. 내 기억에도 자기 전에 엄마 아빠나 이모에게 동화책 읽어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난다. 꽤나 성가신 아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아이가 읽을 만한 책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러 교회로, 또 같은 동네 살던 아는 형의 집으로 전전..

동행이인(同行二人)

일본 시코쿠에 가면 홍법(고코)대사 공해(구카이)의 흔적을 따라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오헨로미치라는 순례길이 있다. 순례자들의 복장은 똑같은데 몸에는 수의를 대신하는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관을 대신해 얼굴을 가려줄 삿갓을 쓰고, 손에는 묘비를 대신할 지팡이를 집고 다닌다. 순례 도중 죽을수도 있는 고독의 길, 실제로 많은 이들이 순례 도중 죽기 때문에, 혹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 깨문에 언제든지 죽어도 될 준비를 하고 걷는 죽음의 길이다. 혼자 걸을 수 밖에 없는 1200km의 그 길을 사람들은 군데군데 놓인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는 표지를 보며 힘을 내고 걷는 다고 한다. 고독의 길을 무형의 동반자를 통해 이겨내는 것이다. 그 동반자는 부처님일 수도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가족일..

송해매력대왕실록

왕력 연 월 일 내용 책수 송혜00 2012 11 1 상이 즉위하였다. 상의 본명은 송혜영이며 시호는 매력이다. 선왕 이명희가 학관정에서 운동춤을 추다가 갑자기 훙서하였다. 그런데 명희대왕이 생전에 세자를 정하지 않아 보위가 정해지지 않았다. 이에 前 영의정 겸 왕비인 이행묵이 급히 궐을 나와 전임대신을 찾아갔으니 그가 바로 오래곤부원군(烏來坤府院君) 박세연이었다. 행묵이 세연을 보고 가로되 "금상께서 갑자기 훙서하셨는데 건저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사국의 보위는 하루도 비워놓을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대비도 없으니 오직 열성조를 섬겨오신 대감께서 알아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세연이 사양하며 가로되 "내 이미 치사한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대통을 논하겠는가?" 하니 행..

雜/무제 2013.05.27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종교학에서 신을 신앙하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력신앙이고 또 하나는 타력신앙이다. 자력신앙이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신과 동등한 혹은 신에 근접한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앙이다. 반면 타력신앙은 신의 능력과 도움을 통해 어떠한 단계 이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자력과 타력신앙 모두 단순한 소원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종교적 사상적 수준의 달성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기복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타력신앙이 강조되어온 반면, 아시아적 전통에서는 자력신앙이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인도의 힌두신앙은 수행을 통해 신과 비슷한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중국의 유교 역시 수신을 통해 성현(聖賢)이라는..

늦봄

늦봄 꽃이 졌습니다. 지난 봄 세상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꽃잎은 모두 흩날려서 사라지고 이제 제법 더운 기가 느껴집니다. 그래도 아직 밤에는 선선하여 술을 마시기 적당하고, 가시지 않은 봄 향기가 코끝을 맴돕니다. 늦봄입니다. 책 읽기 좋고, 생각하기 좋고, 술 마시기 좋은 날이니 왜 문익환 목사님이 자신을 늦봄이라고 불러 주길 바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한 때는 봄을 좋아했습니다. 중춘(仲春)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합니다. 겨울동안 숨죽였던 식물과 동물이 저마다 세상으로 나오고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려는 시기가 바로 중춘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색깔과 향기를 총동원합니다. 이 들뜬 축제와 같은 시기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봄은 짧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만약..

행복

행복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일부러' 선택하는 것이다.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 그리고 이루고 난 뒤에 얻는 작은 성과가 행복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산 결과가 행복인 것이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한동안 괴로워야 한다. 그 속에서 가치를 찾을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인과율이다. 어떠한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는 다른 것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해지려는 것을 우리는 도둑놈이라고 한다. 노동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씨 뿌리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고통스러워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잠시 고민을 놓고 사는 것. 아니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잠시 고민을 놓고 살거나 하고 싶은대로만 하고 살수도 있지만 그것이 삶에..

유서. 2013.05

유 서 인간의 역사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지만 삶과 죽음만은 예상치 못한 우연입니다. 저 역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방식으로 삶을 마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의 죽음 이후에 남아있는 일만은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렇게 유서를 남깁니다. 만일 제가 사고로 혹은 병이나 선택으로 삶을 마친다면 유서 원본은 제 후배 유제훈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제 마지막 가는 길은 제훈이가 정리해주면 좋겠습니다. 이 유서는 2013년 5월 작성되었으며 상황에 따라 수정될 것입니다.따로 벌어놓은 재산이 없기 때문에 딱히 드릴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진 경제적 채무는 부모님께 부탁드리기 바랍니다. 그 정도의 경제적 능력은 있을 것입니다...

雜/무제 2013.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