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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로 가는 길 8 - 일곱번째 원고 (마지막 팀세미나)

17세기~18세기 초 僧軍의 확대와 승려 調發방식의 변화 석사수료박세연 緖論1. 17세기 전반 국가의 승군 활용 1) 임진왜란 이후 승역의 확대 2) 17세기 전반 摠攝을 통한 간접적 승군 조발2. 17세기 후반 의승역의 시행과 승려 조발 방식의 변화 1) 효종대 守禦廳의 정비와 義僧役의 시행 2) 17세기 후반 국가의 직접적 의승 조발 방식의 성립3. 18세기 초 방어체제의 변화와 지방 승군의 확대結論 緖論조선은 성리학의 이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유교국가였다. 조선은 국가통치의 바탕 이념을 성리학으로 삼았으며, 사회구조 자체를 유교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례와 국가제사에서 시작하여 지역 공동체의 각종 행사와 민간의 제사, 세시풍속을 서서히 유교적으로 재편하면서 유교는 종교의 역할을 하..

석사로 가는 길 7 - 여섯번째 원고

17세기~18세기 초 僧軍의 확대와 승려 조발방식의 변화 석사수료박세연 緖論1. 17세기 전반 국가의 승군 활용 1) 임진왜란 이후 승역의 확대 2) 17세기 전반 총섭을 통한 간접적 승군 조발2. 17세기 후반 의승역의 시행과 승려 조발 방식의 변화 1) 효종대 군비확장정책과 의승방번제의 시행 2) 국가의 직접적 승려 조발체제 확립3. 18세기 초 방어체제의 변화와 지방 승군의 확대結論 緖論조선은 성리학의 이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유교국가였다. 조선은 국가통치의 바탕 이념을 성리학으로 삼았으며, 『경국대전』의 육전 체계가 보여주듯이 사회구조 자체를 유교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례와 국가제사에서 시작하여 지역 공동체의 각종 행사와 민간의 제사, 세시풍속을 서서히 유교적으로 재편하면서 유..

석사로 가는 길 6 - 다섯번째 원고

17세기 僧侶의 國役體制 편입 과정 석사수료박세연 緖論1. 17세기 국가재정의 변화상과 僧役의 定役化 1) 17세기 전반 수치제도의 변화와 승역의 확대 2) 17세기 후반 군비확장정책과 義僧役의 시행2. 승려 조발 방식의 변화 寺刹役으로서의 승역 1) 부역승 조발 방식의 변화 - 모입에서 분정으로 2) 의승의 조발과 사찰역으로서의 의승역3. 승역 확대와 승려의 위상 변화結論 緖論조선은 성리학의 이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유교국가였다. 조선은 국가통치의 바탕 이념을 성리학으로 삼았으며, 『경국대전』의 육전 체계가 보여주듯이 사회구조 자체를 유교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유교는 종교이기도 했다. 국가의례와 국가제사에서 시작하여 지역 공동체의 각종 행사와 민간의 제사, 세시풍속에 이르기까지 ..

석사로 가는 길 5 - 네번째 원고

17세기 僧侶의 國役體制 편입 과정 석사수료박세연 緖論1. 17세기 국가재정의 변화상과 僧役의 定役化 1) 17세기 전반 수치제도의 변화와 승역의 확대 2) 17세기 후반 군비확장정책과 義僧役의 시행2. 승려 조발 방식의 변화 寺刹役으로서의 승역 1) 부역승 조발 방식의 변화 - 모입에서 분정으로 2) 의승의 조발과 사찰역으로서의 의승역3. 승역 확대와 승려의 위상 변화結論 緖論조선은 성리학의 이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유교국가였다. 조선은 국가통치의 바탕 이념을 성리학으로 삼았으며, 『경국대전』의 육전 체계가 보여주듯이 사회구조 자체를 유교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유교는 종교이기도 했다. 국가의례와 국가제사에서 시작하여 지역 공동체의 각종 행사와 민간의 제사, 세시풍속에 이르기까지 ..

석사로 가는 길 4 - 세번째 원고

17세기~18세기 초반 僧侶의 國役體制 편입 과정 석사수료박세연 서론1. 壬辰倭亂 이후 국가의 僧侶 활용 1) 壬辰倭亂 이후 力役의 승려 동원 2) 官營手工業의 쇠퇴와 寺刹手工業의 확대2. 17세기 중반 僧役의 제도화 1) 남한산성 義僧防番制의 성립 2) 國家財政의 變通과 折受屬寺의 革罷논의3.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과 지방 부속 1) 僧侶의 戶籍 등재와 승려의 半公民化 2) 寺刹의 郡縣 附屬과 寺刹役결론 : 지방사회에서의 승려와 사찰 서론조선의 국가재정은 田稅·徭役·貢物이라는 세 요소의 수취와 신분관계에 기반한 身役 기초하여 운영되었다.1) 이 몇 가지 재정 수취 체계는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토지를 소유한 자는 누구나 국왕에게 전세를 납부하여야 했다. 그리고 일종의 勞動地代로써 1년의 몇 일..

석사로 가는 길 3 - 두번째 원고

17세기~18세기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과 지방 부속 석사수료박세연 서론1. 壬辰倭亂 이후 僧侶의 비정규적 力役 동원2. 17세기 중반 南漢山城 義僧防番制의 성립과 운영 1) 南漢山城 義僧防番役의 성립 과정 2) 義僧防番役에서의 義僧 調發과 운영3. 僧役의 定役化와 지방의 자율적 승려 관리 1) 義僧防番役의 성립과 지방의 승려 통제 2) 지방의 승역 운용과 승역의 잡역화결론 서론조선의 국가재정은 田稅·徭役·貢物이라는 세 요소의 수취와 신분관계에 기초한 國役에 기초하여 운영되었다. 이 몇 가지 재정 수취 체계는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토지를 소유한 자는 누구나 국왕에게 전세를 납부하여야 했다. 그리고 일종의 勞動地代로써 1년 중 며칠 동안 국가를 위해 요역을 부담해야 했다. 국왕의 臣民으로 노비의..

석사로 가는 길 2 - 첫번째 원고

17세기 僧役의 변화와 應役屬寺의 定立 석사 4학기박세연 緖論Ⅰ. 壬辰戰爭 이후 국가의 僧役 활용 1) 力役으로서의 僧役 강화와 쇠퇴 2) 관영수공업의 쇠퇴와 貢納·進上紙의 寺刹 分定Ⅱ. 僧役의 확대에 따른 折受屬寺의 증가 Ⅲ. 折受屬寺의 革罷와 地方應役屬寺의 定立 1) 國家財政의 變通論議와 折受屬寺의 革罷 2) 應役屬寺의 郡縣 附屬과 寺刹役結論 緖論조선은 불교의 폐해를 비판하며 성리학을 국시로 개국하였다.1) 조선의 중앙정부와 지배층은 虛無寂滅의 異端으로 지목된 불교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때문에 조선초기에 불교의 여러 종파는 선교 양종으로 통합되었고, 일부 사찰만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다. 나머지 사찰의 토지와 노비는 모두 국가로 몰수되어 국가재정에 흡수되었다.2) 그러나 성리학이 ..

석사로 가는 길 1 - 구상발표문

조선후기 寺刹役 연구-승역에서 사찰역으로의 전환과 각종 재정단위의 교차점으로서의 사찰역- 석사4박세연1. 머리말2. 조선후기 승역의 해체와 사찰역의 정착 1) 조선전기의 승역 2) 17세기 수취체제의 변화와 사찰역의 정착3. 사찰역의 내용 4. 조선후기 사찰역의 반대급부 1) 사찰의 위상과 사찰역 2) 사찰역 관련 아문과 시주5. 맺음말 1. 연구사와 문제제기해방 이후 진행된 조선후기에 대한 연구에서 불교는 그다지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다. 특히 사회경제사 연구에서 불교사원은 거의 주목되지 못하였다. 이는 불교가 이전 시대에 비하여 주도적 사상으로서 작동하지 못하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불교는 여성이나 사회 주류에서 소외된 이들만이 신앙했을 것이며 조선시대사의 전체적 흐름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을..

왼쪽의 힘 - 김규항

왼쪽의 힘 - 김규항 오랜만에 쇼스타코비치 5번을 꺼내 듣다 현실 사회주의 생각을 했다. ‘인민이 주인인 나라’를 표방하다가 인민에 의해 무너진 사회.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채만수처럼 ‘스탈린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소련이 미국보다 못한 사회였는가’라며 결기를 보이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덜한가 더한가의 상대적 차이는 있겠지만 나를 포함한 1980년대 운동권들은 대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굴절된 비굴함이 있다. 그 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한껏 경도되었던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과, 낡고 비현실적인 좌파로 보이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비굴함. ‘386’의 추레한 감상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오늘 현실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본연의 이상과 ..

雜/남의 글 2014.01.08

인동작변-만들어진 사건, 은폐된 기억 (박범)

인동작변-만들어진 사건, 은폐된 기억 정조의 사후 정순왕후의 수렴정치 기간 동안 정조가 추진해온 수 많은 정책들이 무산되고 다수의 정치가들이 숙청되었다. 이 때 노론 벽파는 남인들에 대한 정치 공세를 통해 그들의 정치적 재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를 들 수 있다. 신유박해는 노론 벽파가 천주교에 경도된 기호 남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위해 일으킨 종교적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인은 두 부류로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기호 남인과 영남 남인이다. 당시 남인은 천주교도라는 도식 아래 신유박해를 통해 남인이 대거 몰락했다고 역사적 판단을 하지만 영남 남인은 천주교에 관심이 거의 없었고, 신유박해 당시에도 처벌 받은 영남 남인은 거의 없었다. 즉 신유박해..

雜/남의 글 2013.12.09

번뇌를 피하지 않기

번뇌를 피하지 않기 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기분 좋게 맑게 갠 이른 봄날 아침이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워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외투 차림이었다. 바로 전날은 일요일, 그다음 날은 공휴일 - 즉, 징검다리 휴일 사이에 낀 평일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오늘 하루는 쉬고 싶었는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당신은 휴가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평상시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옷을 챙겨입고 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혼잡한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사로 향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아침이었다. 인생 가운데 구별할 수 없는 단 하루였을 뿐이다. 가발을 쓰고 가짜 수염을 붙인 다섯 명의 젊은 ..

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윤소영

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윤소영나의 분석적 방법은 인간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시대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1879~80)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융합’의 역사에서의 ‘스탈린적 편향’=‘경제주의(기본)+주의주의(부차)’의 특수형태- 알튀세르(1972~76) 1. 알튀세르루이 알튀세르 Louis Althusser는 누구인가? 그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알튀세르적 단계’를 개시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프랑스 밖에서 이른바 ‘알튀세르주의 Althusserianism’를 창시했다고 하여 찬양과 동시에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조차도 그의 사상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못하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좌파가 쇠퇴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기..

雜/남의 글 2013.11.13

공부 메모

전근대시대를 공부하다 보면 아무래도 초점이 국가에 맞춰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역사 서술의 초점이 되는 사료가 주로 관찬사료일 경우가 많고, 사람들 개개인의 삶을 통제하고 규정짓는 제도와 정책이 모두 국가에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사논문은 제도사라는 반농반진의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관찬사료를 읽고 제도와 정책을 정리하는 것은 글을 깔끔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사에서 국가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된 것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논쟁 - 즉 조선 망국의 원인에 대한 논쟁의 영향도 크다. 한국사학계와 경제사학계의 논쟁은 주로 조선이 "근대적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는가 아닌가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80년대 이른바 민중사관이 난관에 봉착하고 지주 대 농민의 계급적 구도가 실증의..

사랑과 소유

사랑과 소유 연애의 시대다. 누구나 연애를 하고 싶어 하고 연애가 없는 것이 놀림거리가 되거나 자조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저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연애의 환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청춘이 사랑을 찾는 것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었던 일이었지만 요즘처럼 연애가 범람하는 시절도 드문 것 같다. 단연컨데 지금은 연애에 대한 환상도 거기에 따르는 상품도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가장 넘치는 시기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것이 무엇이 나쁘겠냐만은 그래도 지금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범람하는 남/여 역차별의 주된 화제는 데이트 비용이다. 남성이 일방적으로 지불하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한심한 TV 프로그램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보살행과 선물

대승불교에서는 “보살행을 하면 스스로 보살행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보살행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보살행은 이타행이다. 즉 나를 버리고 다른 이를 위하여 보시를 베푸는 한편, 계율을 지키고 선정에 잠겨 마침내 반야바라밀 즉 최고의 지혜를 얻는데 이르는 것이다. 보살행을 함에 있어서 그것이 보살행임을 인지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마음 속에 대가를 원하는 생각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즉 작게는 나의 보시를 물건이나 금전으로 보상받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는 이 보살행을 통해 성불(成佛)이라는 대가를 얻어내겠다는 마음이 자라나는 것을 막기 위해 보살행에 대한 인식 자체를 금기시하는 것이다. 이는 베푸는 사람만이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니다. 보시를 받는 사람 역시 여기에 대한 어떠한 부담감이나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