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47

미륵, 지배자의 이념에서 민중의 이념으로

미륵, 지배자의 이념에서 민중의 이념으로 선운사 도솔암 마애여래좌상 (보물 1200호) 가운데 하얗게 테투리가 처진 네모가 배꼽 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92년, 고창에 위치한 선운사에서는 여러 곳에서 모인 농민들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선운사의 산내 암자인 도솔암 내원궁에는 거대한 절벽에 무려 17미터 높이의 마애불(절벽에 새긴 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마애불의 중간에는 구멍을 뚫었다가 막았던 흔적이 있고, 이것을 보통 미륵불의 배꼽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마애불의 배꼽에는 때가 되면 나올 세상을 뒤집을 비결(秘訣)이 숨겨져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는데, 바로 지금 그 비결을 동학의 대접주인 손화중이 나서서 얻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 미륵불의 배꼽에 새로운 세상에 ..

史/조선 2012.11.27

글씨체에 담긴 지향점, 허목의 전서

[고대박물관이 살아있다] 글씨체에 담긴 지향점 ⑨ 허목의 전서 [1684호] 2011년 11월 20일 (일) 19:57:42 고대신문news@kukey.com “허목(許穆)의 전서(篆書)는 괴이하니 금지시켜야 합니다.” 숙종 8년 서인(西人)인 이조판서 이정영이 숙종에게 청한 내용이다. 허목(1595-1682)이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이기 때문에 서인인 이정영이 그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어째서 허목이란 사람이 아닌 그의 글씨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의 당시로서 파격적이었던 허목의 서체에 그의 정치적인 지향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서는 한자 서체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고대 중국의 하(夏)·상(商)·주(周)나라의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각 국의 ..

史/조선 2012.10.16

국가권력과 불교 - 조선의 경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시점부터,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은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갈등하고 때로는 타협하였다. 국가의 입장에서 종교는 현실 권력이 치유해줄 수 없는 臣民의 심성 을 통제하기 위하여 꼭 필요했지만, 동시에 그 권한이 국가권력을 초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곧 국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종교의 입장에서 국가권력의 비호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또한 종교권력이 초월적 존재의 신의 권위에 기초한 만큼 군주 역시 종교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의 東傳 이래 동아시아 세계에서 역시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의 갈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北朝에서 3차례의 廢佛 이후 국가권력의 우위가 선언되면서 종교권력은 국가권력에 종속되지만 동시에 존중받는 ..

史/조선 2012.08.16

양반과 노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쓰여진 일기인 쇄미록을 통해서 양반과 노비의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의 일부분을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쇄미록은 조선 선조 때의 양반인 오희문의 일기입니다. 일기는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에서 시작하여 1601년 까지 쓰여지고 있습니다. 오희문은 해주 오씨로 집안은 벼슬을 한 양반가였지만 본인은 벼슬을 하지 못했고, 아들이 출세하여 말년에 선공감감역이라는 명예직만 하였습니다. 그는 1591년 전라도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는 시집간 누이를 방문하고, 외방노비의 신공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도중에 임진왜란이 터졌고, 원치 않은 피난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희문은 피난 생활을 하면서 거의 매일 일기를 썼는데, 이 것이 쇄미록입니다. 쇄미..

史/조선 2012.07.28

합리적 정치운영 : 조선과 대한민국

합리적 정치운영 : 조선과 대한민국 흔히 근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합리성에 기초하여 전근대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개조하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적용되는 법제도, 정부조직, 경제구조 등을 만든 것이 바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근대는 합리성의 시대, 전극대는 비합리성의 시대라고 흔히 이해되어 왔습니다. 특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착각하기 쉬운 인간의 보수성 덕분에 "역사는 진보하고 있으며, 과거는 불행한 시대,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꽤 괜찮은 시대"라고 흔히들 생각하는 것이 전근대=비합리, 근대=합리라는 공식을 사람들의 머리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게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의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

史/조선 2012.07.28

우리집 족보는 진짜일까?

족보는 아직까지 많은 관심의 대상입니다. 우리 집 족보가 과연 진짜일까? 우리 조상은 진짜 나의 조상일까? 족보가 있으면 양반이라는데 나는 과연 양반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신분제사회가 철폐된지 1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꽤 많은 관심의 대상이며, 우리 사회에는 의외로 종친회, 대종회 등등이 꽤 강력한 집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족보와 성에 관해서 아주 간략하게 다루어 볼까 합니다. 이번 시간에 다루지 못한 내용은 다음 강의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姓과 氏는 다른 의미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성은 일종의 종족을 의미합니다. 주나라 왕족의 성은 희(姬)이고, 태공망의 성은 여(呂)인데, 이는 종족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씨는 성보다는 아래의 개념이지만 꼭 하위개념이라..

史/조선 2012.07.27

부석사의 미투리 생산

조선시대 승려들은 왕실과 연결된 사찰을 제외하고는 (혹은 왕실과 연결된 절이라고 할 지라도) 대부분 자급자족하여야 했기 때문에 농업은 물론이고 수공업과 상업에도 종사하여야 했습니다. 농업은 조선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산업이기 때문에 승려들 역시 당연히 농업에 종사했지만, 수공업과 상업도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조선시대 사원은 대부분 국가에 공물을 부담하여야 했습니다. 지리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원 부담의 공물은 종이, 미투리, 고사리, 도라지, 잣, 밤, 화살대용 대나무, 목기, 버섯, 머루, 홍시, 으름 등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이는 국가와 지방관청이 사원이 부담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물건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큰 사찰에서는 종이를 만들어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청에 납부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史/조선 2012.07.27

조선전기 불교탄압사

양주 회암사지. 거대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양주군 회천면에는 거대한 유적이 펼쳐져있습니다. 지금도 수년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곳은 대단한 고구려나 백제의 유적도 아니고, 조선 명종 때 사라진 한 절터입니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 곳은 왠만한 궁궐보다 넓은 면적과 화련한 건축물의 흔적, 궁궐 건축에 쓰이는 기법 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태조부터 명종 때 까지 명실상부한 조선 불교의 중심이었던 회암사의 터입니다. 현재 회암사지 발굴 현장에서 1~2km 올라간 곳에는 해방 이후 새로 지은 회암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에는 부도와 비석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거의 영화는 간데 없지만 그래도 흔적은 많이 남아있죠. 지금도 각이 서 있는 장대석들은 회암사의 수준이 그냥 ..

史/조선 2012.07.27

경주 3가문의 신라왕릉 나눠먹기

지금의 경주 시가지는 과거 조선시대의 읍치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 경주시내인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 구황동, 인왕동, 계림로 등 일대에는 무덤과 절터가 즐비한데,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망한 나라의 무덤이기는 하지만 성리학에서 선조의 무덤을 훼손한다는 것은 최고의 불효이자 터부였기 때문에 본래 조선에는 도굴이 없었습니다. 중국과 대비하면 신기할 정도의 일이지요. 물론 조선시대에는 부장품을 많이 넣지 않는 박장의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파도 재화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것 같습니다. 경주에는 이 외에도 신라의 3성 시조를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세종 때 박혁거세를 제사지내기 위해 나라에서 짓고, 경주부윤이 제사를 지내던 숭덕전이 대표적인 사당입니..

史/조선 2012.07.27

문묘 종사와 당쟁

성균관 대성전 (보물 141호) 오늘은 보물로 지정된 서울 문묘(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삼문. 이외 건축물과 대지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 대성전에 모셔진 인물들을 통해 조선시대의 당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약속드렸던 고려와 티벳의 관계는 아직 자료를 더 봐야 할 것 같아서 다음 시간으로 부득이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를 관통하는 붕당, 당쟁이라는 것이 문묘 종사를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오늘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우리 사조에도 성균관이 존재하기에 성균관과 문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건축적으로 비천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균관 건축물들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고, 선조 35년 (1602년) 중건된 것입니..

史/조선 2012.07.27

서계 박세당의 역사적 위치

서계 박세당의 역사적 위치 조선후기 석사3 박세연 1. 머리말 양란 이후 국가재조의 과제를 안은 조선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대와 대명의리라는 이념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어 국가의 주류·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후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사상사과 정치사의 흐름은 어떻게 하면 더 주자 성리학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노력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조선성리학은 인식론적 차원에 머물러 있던 유학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에 반발하는 흐름 역시 계속 등장하였다. 주자-퇴계-율곡으로 이어지는 ‘道統’을 지키려했던 서인-노론세력 밖에서 혹은 그 안에서 일관적인 흐름에 대한 반발이 등장했던 것이다. 최명길, 김육, 조익 등 조정 ..

史/조선 2012.07.24

조선초기 세조대 불교적 상서의 정치적 의미

석사 2학기 레포트, 사총 74호 게재논문의 원형 朝鮮初期 世祖代 佛敎的 祥瑞의 政治的 意味 석사2 박세연 1. 머리말 2. 불교적 상서의 정치·사상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2) 사상적 배경 3. 불교적 상서의 발생과 그 의미 4. 불교적 상서가 만드는 이미지의 재생산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세조는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건국 이후 세종을 거쳐 국가의 기본 통지체제가 마련되고, 그것의 최종적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대전이 처음 편찬되는 시기가 바로 세조대이다. 이런 면에서 세조대는 조선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하는 경국대전체제가 자리 잡는 시기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조는 유교적 정치체제의 확립과는 반대로 유교적 명분에 어긋나는 즉위 과정을 거..

史/조선 2012.07.23

한국유학사 제11장 퇴계·율곡과 동시대의 성리학

한국유학사 제11장 퇴계·율곡과 동시대의 성리학 석사4 박세연 명종, 선조 시대에는 많은 학자들이 이기와 심성의 학문을 발달시켜 유학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李滉과 李珥였다. 이황(1501~1570)은 경상도 예안 출신으로 29세인 중종 24년(1529년) 문과 급제 이후 여러 직을 거쳤으나 전원을 동경하고 학문에 충실하기 위해 진퇴를 거듭하였다. 만년에 도산에 서당을 세우고 공부하니 여러 학인들이 모여들었는데 이이 역시 23세에 퇴계에게 도를 물은 바 있다. 이황의 근본사상은 程朱를 철저히 따르는 것이었는데, 특히 이기이원론은 주희의 해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주희는 이기 양자의 불잡성과 불리성을 동시에 말했으나 이기를 二物로 보았다. 이황은 형이상적인 理와 형이하적인 氣가 하나일 수..

史/조선 2012.07.23

17세기 조선과 유학

17세기 조선과 유학 석사 4 박세연 17세기 조선은 어떤 사회이며, 17세기의 조선 유학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17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거치고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시기이다. 동시에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이라는 동아시아적 대사건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해야했다. 때문에 17세기 지식인들의 사상,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학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후기 사상계의 성격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17세기 사상계와 유학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다른 시기에 비하여 소흘한 것이 사실이다. 16세기 사상사가 退溪와 栗谷, 南冥과 花潭 등을 통해 “조선성리학”이 성립된 것으로 주목받았으며, 18세기 사상..

史/조선 2012.07.16

조선시대 경제사 세미나 1차 커리

조선시대 경제사 세미나 1차 커리 役制과 貢納制를 경제사 세미나 첫머리에 보려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조선시대 전 시기를 거쳐 국가재정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전세제도가 비교적 貢法으로 비교적 일찍 정리되는데 비하여, 봉건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인 두 가지 문제는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국가에서 논의되고 다양한 방법이 제안됩니다. 때문에 역제와 공납제를 이해하는 것은 500년간 계속되는 변통논의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역제는 국가가 人身을 동원해야 한다는 면에서 인민의 가장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일찍부터 代立·代納이 등장하고 이러한 경향은 중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제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

史/조선 2012.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