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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잡역혁파절목

辛卯六月 日明禮宮完文判下完文節目慶尚道陜川伽倻山天下名山生佛住處海印寺尤其勝地曁我太祖大王龍潜親設百日禱 佛即登寶位宜此寺爲 宗室願刹萬機踏臻潜心大乘印經十件劃標内耕結俾爲香供之資天順元年春世祖大王南巡 駐蹕于此清齋精勤印經五十件 賜牌定界遂灑宸翰曰慶尚道陜川海印寺乙良監司守令曾下傳旨尤加完護雜役勿侵者教旨留鎭山門越癸卯仁粹王大妃仁惠王大妃兩殿遹追先志撤舊一新宸顧彌天 佛月昭感雄鎭修基豈無度躍應以陰切密照燮理之德⊙是此刹特定世子宮億千萬歳仙李長春無彊祝釐淨刹監司守令以軆此意更審完護全意竭誠奉祝之地關飭營邑後難支痼瘼一並革罷次條列節目成送此後若有一毫更侵別般論處矣惕念擧行事一本寺爲 祝奉行則事軆尤爲自別和尚僧統之任自禮曺出帖擧行是矣其職不輕且重使星守令勿以輕忽歐打爲齊一本寺四處局内爲祝香炭封山 劃下東至可質嶺西去馬亭峙南距武陵地北到鼻持嶺 賜標此中松楸柴雜木等一草一葉如陵園藪林一截嚴禁..

史/사원고문서 2012.11.20

대구용천사견역절목

備邊司大丘湧泉寺蠲役節目大邱湧泉寺蠲役節目備邊司爲相考事即接内需司所報則以爲本司單字内粘連明禮宮手本内即接慶尚道大丘湧泉寺僧仁祥等所志則以爲矣僧等所居寺卽新羅所建千餘年古刹而近來雜役層生横侵多端殆無寧日緇徒日漸渙散支撑萬無其路情願仰屬本宮特免雜役使之保存亦爲有臥乎所大抵千年古刹疲於雜役將至廢棄極渉矜惻且寺刹之屬於各宮房者已例昭昭今此湧泉寺特許屬之本宮營府所應各項雜役一切蠲免俾得保存事司以具由入 啓移報禮曺行關本道監營知委施行後擧行形止爲先牒報以爲憑處之地爲白良結呈手手本爲白有昆依手本施行事移報備局何如判下内依晉州玉泉寺例許屬而其時成給節目之備堂處詳問事實仍又分付道臣除役使之無弊上納之意報備局事 判下教是置 判下内辭意相考施行爲只爲牒呈是置有亦大抵寺刹之盛衰其所關係亦云不輕是如乎昔則八路之深山鉅谷梵宇聯絡緇徒殷盛以之護養樹木以之禁遏逋逃列邑官民之收效者多挽近以來營邑不恤徴責多端僧皆散亡寺..

史/사원고문서 2012.11.16

강화의 성공회 전래와 강화 성공회 성당

강화의 성공회 전래와 강화 성공회 성당 대학원 석사과정 박세연 들어가며 강화도에는 전통 한옥건축과 서양식 교회건축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의 성공회 성당이 2곳 있다. 강화 읍내인 관청리에 위치한 강화 성공회성당과 길상면의 면소재지인 온수리에 위치한 온수리 성공회 성당이 그 곳이다. 두 성당 모두 대한제국 시기에 지어졌는데, 강화 성공회 성당은 그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424호로 지정되었으며 온수리 성당 역시 인천유형문화재 52호, 사제관은 인천유형문화재 41호로 지정되어있다. 강화도의 성공회 성당들은 지성소와 회중석, 회랑이라는 서양식 교회건축에 필수적인 요소를 갖추면서도 韓式 목조건축과 기와지붕의 전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게다가 유교 건축과 ..

史/근현대 2012.10.24

글씨체에 담긴 지향점, 허목의 전서

[고대박물관이 살아있다] 글씨체에 담긴 지향점 ⑨ 허목의 전서 [1684호] 2011년 11월 20일 (일) 19:57:42 고대신문news@kukey.com “허목(許穆)의 전서(篆書)는 괴이하니 금지시켜야 합니다.” 숙종 8년 서인(西人)인 이조판서 이정영이 숙종에게 청한 내용이다. 허목(1595-1682)이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이기 때문에 서인인 이정영이 그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어째서 허목이란 사람이 아닌 그의 글씨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의 당시로서 파격적이었던 허목의 서체에 그의 정치적인 지향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서는 한자 서체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고대 중국의 하(夏)·상(商)·주(周)나라의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각 국의 ..

史/조선 2012.10.16

사원경제 관련 고문서 목록

소장처 문서종류 제목 내용요약 발급연도1 발급연도2 발급처 수신처 도 군현 비고 관련문헌 직지사 완문 金山直指寺完文 1767 영조32 道巡使 直指寺 경상도 김천 고문서집성100 용문사 완문 完文 1900 광무4 掌隸院 龍門寺 경상도 예천 고문서집성100 동국대 완문 龍門寺雜役蠲減完文 1950 철종1 戶曹 龍門寺 경상도 예천 동국대 완문 醴泉龍門寺僧西岳寺守番革罷完文 1854 철종5 暗行御史 龍門寺 경상도 예천 동국대 완문 醴泉龍門寺僧覺華寺守番勿侵完文 1738 영조14 安東營 龍門寺 경상도 예천

史/사원고문서 2012.09.21

종사일기(남승일기) 5월 14일

1835-05-14 晴 甲峴權雅致和來訪卽權寶城從孫也 맑았다. 갑현 권치화 어르신이 내방하였으니 즉 권보성의 종손이다. 1835-05-15 晴 ○賀禮而環点考 ○還分租四十六石一斗一升 常作錢五十五兩二戔九分 每石一兩二戔式 太三十八石一斗七升 常作錢五十七兩一戔八分 已上錢還一百十二兩四戔七分 均給八洞民前後二等分給錢還合一百七十八兩九戔一分 ○前坪都是馬位畓而開梁始役 故出看之 맑았다. ○하례하고 돌아와 점고하였다. ○환분은 쌀 16석 1두 1승이니 작전하면 55냥 2전 9푼이며 매석 1냥 2전씩이다. 콩은 38석 1두 7승이니 작전하면 57냥 1전 8푼이다. 이미 돈으로 바꾼 것이 112냥 4전 7푼이다. 여덟동의 백성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전후 이등으로 나누어 주었다. 돈으로 바꾸면 합이 178냥 9전 1푼이다. ○前坪은..

史/사료 2012.09.09

국가권력과 불교 - 조선의 경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시점부터,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은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갈등하고 때로는 타협하였다. 국가의 입장에서 종교는 현실 권력이 치유해줄 수 없는 臣民의 심성 을 통제하기 위하여 꼭 필요했지만, 동시에 그 권한이 국가권력을 초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곧 국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종교의 입장에서 국가권력의 비호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또한 종교권력이 초월적 존재의 신의 권위에 기초한 만큼 군주 역시 종교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의 東傳 이래 동아시아 세계에서 역시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의 갈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北朝에서 3차례의 廢佛 이후 국가권력의 우위가 선언되면서 종교권력은 국가권력에 종속되지만 동시에 존중받는 ..

史/조선 2012.08.16

인평대군『연도기행』

인평대군『연도기행』 조선후기 석사 1 박세연 1. 해제 인평대군 李㴭가 지은 연도기행은 효종 7년(1656년) 인평대군이 謝恩使(혹은 陳奏使)로 다녀오면서 그 여정을 기록한 책으로 인평대군의 문집인 松溪集에 실려 있다. 글머리에는 인평대군의 연행내력 전체를 기록하여 후에 덧붙인 總叙가 있으며, 연행을 시작한 1656년(丙申年) 8월 3일부터 집으로 돌아온 12월 16일까지의 일록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셋째 대군이자, 소현세자와 효종의 동생으로, 소현세자와 효종이 심양관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가 잠시 차례로 귀국할 때 대신 인질로 심양관에 머물었던 경험이 있다. 청에서 사신으로 왕족을 선호하였고, 또 연행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인평대군은 여러 번 사신으로 청을 드나들었다. 효종의 ..

史/사료 2012.08.07

일제시대 경복궁에 모인 유물들

지금은 경복궁 복원사업이 한창입니다만 예전에는 경복궁이 절반 이상이 잔디밭이었습니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는 육중한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고, 뒤편에는 민속박물관 근처에는 전통공예전시관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육중하고 권위적인 건물이 또 하나 있었죠. 그리고 넓은 경복궁 잔디밭에는 탑과 석등, 부도 등등의 석조 문화재들이 널려있었습니다. 지금은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하나만 빼고 모두 용산의 박물관이나 본래 있던 지역의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지금도 경복궁이라고 하시면 잔디밭에 널려있던 석조물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경복궁이 일제시대에 훼손되었고, 잔디밭의 석물들이 일제에 의해 옮겨왔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사연을 아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 같..

史/근현대 2012.07.28

한(漢)과 흉노. 독립된 천하

한(漢)과 흉노. 독립된 천하 동양에서 천자(天子)를 칭한다는 것은 곳 자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관을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황제들이 그러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왕(大王)이 그러했으며, 일본 역시 천황(天皇)을 칭하며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천하관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한(漢)대에 중앙아시아를 주름잡았던 흉노의 선우 역시 황제와 동등한 자신만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야만민족이라는 선입관이 덧씌워진체 인식되는 흉노가 사실 당시 아시아를 양분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글에서는 사기의 흉노열전을 중심으로 흉노와 한이 각각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들이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천하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한(漢)이 보는 흉노(匈奴)에 ..

史/동양사 2012.07.28

양반과 노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쓰여진 일기인 쇄미록을 통해서 양반과 노비의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의 일부분을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쇄미록은 조선 선조 때의 양반인 오희문의 일기입니다. 일기는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에서 시작하여 1601년 까지 쓰여지고 있습니다. 오희문은 해주 오씨로 집안은 벼슬을 한 양반가였지만 본인은 벼슬을 하지 못했고, 아들이 출세하여 말년에 선공감감역이라는 명예직만 하였습니다. 그는 1591년 전라도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는 시집간 누이를 방문하고, 외방노비의 신공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도중에 임진왜란이 터졌고, 원치 않은 피난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희문은 피난 생활을 하면서 거의 매일 일기를 썼는데, 이 것이 쇄미록입니다. 쇄미..

史/조선 2012.07.28

합리적 정치운영 : 조선과 대한민국

합리적 정치운영 : 조선과 대한민국 흔히 근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합리성에 기초하여 전근대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개조하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적용되는 법제도, 정부조직, 경제구조 등을 만든 것이 바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근대는 합리성의 시대, 전극대는 비합리성의 시대라고 흔히 이해되어 왔습니다. 특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착각하기 쉬운 인간의 보수성 덕분에 "역사는 진보하고 있으며, 과거는 불행한 시대,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꽤 괜찮은 시대"라고 흔히들 생각하는 것이 전근대=비합리, 근대=합리라는 공식을 사람들의 머리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게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의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

史/조선 2012.07.28

미술사, 구성된 역사

미술사, 구성된 역사 1. 들어가며 : 낮선 역사, 미술사. 역사학(특히 문헌사학)을 공부하는 이에게 미술사는 어떤 의미일까? 어느 문화권이나 사회든지 미술 역시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하나의 거울이며, 또한 의미 있는 사료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의 역사학 전공자들에게 미술사는 낯선 영역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체계를 가진 학문이다. 문헌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은 해방 후 학문의 체계가 잡히고 있을 때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학 전공자는 미술사를 편협한 학문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술사는 분명 역사의 한 갈래이며, 역사학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 역시 미술사에 그대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사학에서 오랫동안 서구중심주의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

史/그 외 2012.07.27

우리집 족보는 진짜일까?

족보는 아직까지 많은 관심의 대상입니다. 우리 집 족보가 과연 진짜일까? 우리 조상은 진짜 나의 조상일까? 족보가 있으면 양반이라는데 나는 과연 양반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신분제사회가 철폐된지 1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꽤 많은 관심의 대상이며, 우리 사회에는 의외로 종친회, 대종회 등등이 꽤 강력한 집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족보와 성에 관해서 아주 간략하게 다루어 볼까 합니다. 이번 시간에 다루지 못한 내용은 다음 강의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姓과 氏는 다른 의미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성은 일종의 종족을 의미합니다. 주나라 왕족의 성은 희(姬)이고, 태공망의 성은 여(呂)인데, 이는 종족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씨는 성보다는 아래의 개념이지만 꼭 하위개념이라..

史/조선 2012.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