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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의 미투리 생산

조선시대 승려들은 왕실과 연결된 사찰을 제외하고는 (혹은 왕실과 연결된 절이라고 할 지라도) 대부분 자급자족하여야 했기 때문에 농업은 물론이고 수공업과 상업에도 종사하여야 했습니다. 농업은 조선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산업이기 때문에 승려들 역시 당연히 농업에 종사했지만, 수공업과 상업도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조선시대 사원은 대부분 국가에 공물을 부담하여야 했습니다. 지리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원 부담의 공물은 종이, 미투리, 고사리, 도라지, 잣, 밤, 화살대용 대나무, 목기, 버섯, 머루, 홍시, 으름 등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이는 국가와 지방관청이 사원이 부담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물건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큰 사찰에서는 종이를 만들어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청에 납부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史/조선 2012.07.27

어느 민족종교의 불행한 최후

조계사 대웅전 (서울유형문화재 127호) 사진출처 : 다음 백과사전 한국 불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의 총본산은 어디일까요? 많은 분들이 혹 삼보사찰인 통도사나 송광사, 해인사를 떠올리실 수 있겠지만 조계종의 총본산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조계사입니다. 조계사는 그 역사가 오래된 절은 아닙니다. 본래 한양 사대문안에는 승려의 출입이 금지되고, 사찰 건립 또한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종로의 원각사나 정동의 흥천사 같이 특수한 목적을 지닌 몇 개 사찰은 예외가 있었지요. (믿기지 않지만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그 쪽에 숲이 우거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태종대왕 때 흥천사가 사라지고, 연산군 때 원각사마저 사라지면서 사대문 안에 사찰은 그 흔적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는 ..

史/근현대 2012.07.27

조선전기 불교탄압사

양주 회암사지. 거대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양주군 회천면에는 거대한 유적이 펼쳐져있습니다. 지금도 수년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곳은 대단한 고구려나 백제의 유적도 아니고, 조선 명종 때 사라진 한 절터입니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 곳은 왠만한 궁궐보다 넓은 면적과 화련한 건축물의 흔적, 궁궐 건축에 쓰이는 기법 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태조부터 명종 때 까지 명실상부한 조선 불교의 중심이었던 회암사의 터입니다. 현재 회암사지 발굴 현장에서 1~2km 올라간 곳에는 해방 이후 새로 지은 회암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에는 부도와 비석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거의 영화는 간데 없지만 그래도 흔적은 많이 남아있죠. 지금도 각이 서 있는 장대석들은 회암사의 수준이 그냥 ..

史/조선 2012.07.27

경주 3가문의 신라왕릉 나눠먹기

지금의 경주 시가지는 과거 조선시대의 읍치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 경주시내인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 구황동, 인왕동, 계림로 등 일대에는 무덤과 절터가 즐비한데,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망한 나라의 무덤이기는 하지만 성리학에서 선조의 무덤을 훼손한다는 것은 최고의 불효이자 터부였기 때문에 본래 조선에는 도굴이 없었습니다. 중국과 대비하면 신기할 정도의 일이지요. 물론 조선시대에는 부장품을 많이 넣지 않는 박장의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파도 재화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것 같습니다. 경주에는 이 외에도 신라의 3성 시조를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세종 때 박혁거세를 제사지내기 위해 나라에서 짓고, 경주부윤이 제사를 지내던 숭덕전이 대표적인 사당입니..

史/조선 2012.07.27

문묘 종사와 당쟁

성균관 대성전 (보물 141호) 오늘은 보물로 지정된 서울 문묘(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삼문. 이외 건축물과 대지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 대성전에 모셔진 인물들을 통해 조선시대의 당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약속드렸던 고려와 티벳의 관계는 아직 자료를 더 봐야 할 것 같아서 다음 시간으로 부득이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를 관통하는 붕당, 당쟁이라는 것이 문묘 종사를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오늘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우리 사조에도 성균관이 존재하기에 성균관과 문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건축적으로 비천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균관 건축물들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고, 선조 35년 (1602년) 중건된 것입니..

史/조선 2012.07.27

서계 박세당의 역사적 위치

서계 박세당의 역사적 위치 조선후기 석사3 박세연 1. 머리말 양란 이후 국가재조의 과제를 안은 조선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대와 대명의리라는 이념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어 국가의 주류·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후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사상사과 정치사의 흐름은 어떻게 하면 더 주자 성리학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노력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조선성리학은 인식론적 차원에 머물러 있던 유학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에 반발하는 흐름 역시 계속 등장하였다. 주자-퇴계-율곡으로 이어지는 ‘道統’을 지키려했던 서인-노론세력 밖에서 혹은 그 안에서 일관적인 흐름에 대한 반발이 등장했던 것이다. 최명길, 김육, 조익 등 조정 ..

史/조선 2012.07.24

조선초기 세조대 불교적 상서의 정치적 의미

석사 2학기 레포트, 사총 74호 게재논문의 원형 朝鮮初期 世祖代 佛敎的 祥瑞의 政治的 意味 석사2 박세연 1. 머리말 2. 불교적 상서의 정치·사상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2) 사상적 배경 3. 불교적 상서의 발생과 그 의미 4. 불교적 상서가 만드는 이미지의 재생산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세조는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건국 이후 세종을 거쳐 국가의 기본 통지체제가 마련되고, 그것의 최종적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대전이 처음 편찬되는 시기가 바로 세조대이다. 이런 면에서 세조대는 조선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하는 경국대전체제가 자리 잡는 시기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조는 유교적 정치체제의 확립과는 반대로 유교적 명분에 어긋나는 즉위 과정을 거..

史/조선 2012.07.23

한국유학사 제11장 퇴계·율곡과 동시대의 성리학

한국유학사 제11장 퇴계·율곡과 동시대의 성리학 석사4 박세연 명종, 선조 시대에는 많은 학자들이 이기와 심성의 학문을 발달시켜 유학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李滉과 李珥였다. 이황(1501~1570)은 경상도 예안 출신으로 29세인 중종 24년(1529년) 문과 급제 이후 여러 직을 거쳤으나 전원을 동경하고 학문에 충실하기 위해 진퇴를 거듭하였다. 만년에 도산에 서당을 세우고 공부하니 여러 학인들이 모여들었는데 이이 역시 23세에 퇴계에게 도를 물은 바 있다. 이황의 근본사상은 程朱를 철저히 따르는 것이었는데, 특히 이기이원론은 주희의 해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주희는 이기 양자의 불잡성과 불리성을 동시에 말했으나 이기를 二物로 보았다. 이황은 형이상적인 理와 형이하적인 氣가 하나일 수..

史/조선 2012.07.23

성덕대왕신종명

聖德大王神鍾之銘 朝散大夫兼太子司議郞翰林郞金弼奧奉敎撰 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視之不能見其原大音震動於天地之間聽之不能 聞其響是故憑開假說觀三眞之奧載懸擧神鍾悟一乘之圓音夫其鍾也稽 之佛土則驗在於罽膩尋之帝鄕則始制於鼓延空而能鳴其響不竭重爲難 轉其體不褰所以王者元功克銘其上群生離苦亦在其中也伏惟 聖德大王德共山河而幷峻名齊日月而高懸擧忠良而撫俗崇禮樂而觀風 野務本農市無濫物時嫌金玉世尙文才不意子靈有心老誡四十餘年臨邦 勤政一無干戈驚擾百姓所以四方隣國萬里歸賓唯有欽風之望未曾飛矢 之窺燕秦用人齊晉替覇豈可幷輪雙轡而言矣然雙樹之期難測千秋之夜 易長晏駕已來于今三十四也頃者 孝嗣景德大王在世之日繼守 丕業監撫庶機早隔 慈規對星霜而起戀重違 嚴訓臨闕殿以 增悲追遠之情轉悽益魂之心更切敬捨銅一十二萬斤欲鑄一丈鍾一口立 志未成奄爲就世今 我聖君行合 祖宗意符至理殊祥異於千 古令德冠於常時六街龍雲蔭..

史/사료 2012.07.16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안기

(前面)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遶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乇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後面)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並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史/사료 2012.07.16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조상기 381자

22 21 20 19 18 17 16 15 14 13 12 11 10 9 8 7 6 5 4 3 2 1 年 心 己 六 大 妻 弟 休 資 志 邇 門 千 七 老 無 有 所 盖 山 爲 開 1 六 願 消 塵 吉 阿 良 愷 國 誠 都 壞 言 致 之 智 願 以 聞 寺 亡 元 2 十 者 尊 咸 妹 好 誠 元 主 之 之 色 之 王 逍 略 咸 顯 至 一 考 七 3 六 庶 容 登 首 里 小 伊 大 資 劇 空 道 事 遙 以 成 法 道 所 仁 年 4 古 同 不 十 肹 兼 舍 飡 王 業 務 而 德 於 志 匡 弟 應 玄 石 章 己 5 人 營 □ 號 買 庶 玄 公 履 建 雖 俱 辯 淸 重 時 子 之 微 阿 一 未 6 成 其 无 縱 里 兄 度 出 千 甘 在 滅 名 朝 眞 僅 志 三 不 彌 吉 二 7 之 善 求 使 及 及 師 有 年 山..

史/사료 2012.07.16

17세기 조선과 유학

17세기 조선과 유학 석사 4 박세연 17세기 조선은 어떤 사회이며, 17세기의 조선 유학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17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거치고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시기이다. 동시에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이라는 동아시아적 대사건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해야했다. 때문에 17세기 지식인들의 사상,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학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후기 사상계의 성격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17세기 사상계와 유학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다른 시기에 비하여 소흘한 것이 사실이다. 16세기 사상사가 退溪와 栗谷, 南冥과 花潭 등을 통해 “조선성리학”이 성립된 것으로 주목받았으며, 18세기 사상..

史/조선 2012.07.16

조선시대 경제사 세미나 1차 커리

조선시대 경제사 세미나 1차 커리 役制과 貢納制를 경제사 세미나 첫머리에 보려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조선시대 전 시기를 거쳐 국가재정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전세제도가 비교적 貢法으로 비교적 일찍 정리되는데 비하여, 봉건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인 두 가지 문제는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국가에서 논의되고 다양한 방법이 제안됩니다. 때문에 역제와 공납제를 이해하는 것은 500년간 계속되는 변통논의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역제는 국가가 人身을 동원해야 한다는 면에서 인민의 가장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일찍부터 代立·代納이 등장하고 이러한 경향은 중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제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

史/조선 2012.07.16

내포 지방 백제불상의 특징

충남지역 백제불상의 특징 -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며 백제의 정확한 세력권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백제의 문화는 매우 발전하였고, 그 파급력도 매우 컸다는 것이다. 비록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의 위치도 최근 풍납동 유적의 발굴로 어느 정도 연구의 진척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고, 또 다른 도읍지인 웅진과 사비, 지금은 공주, 부여 역시 가시적인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남아있는 유적, 유물이나 일본에 전래되고 있는 유물들을 보았을 때, 백제의 문화가 매우 세련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충남지역은 백제 22대 문주왕 이래로 백제의 중심지였다. 백제의 가장 핵심적인 유물과 유적들이 이 지역에 많..

史/그 외 2010.01.11

답사수업교재 - 불교 작성중

아놔 이거 언제 다한댜 불교문화의 이해 1. 개관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를 가리킵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천 수백여년동안 불교는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현재도 한국인의 절반 정도가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정부에 등록된 전통사찰만 수 천 곳에 달할 만큼, 불교 문화유산 역시 많습니다. 따라서 불교문화를 파악하는 것은 답사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불교문화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여러 불교와 불교문화재의 용어들이 한자로 되어있고, 용어의 의미를 이해하기보다는 무조건 외우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불교는 답사수업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치를 떠는 부분이 되어가는 것 같네요. 하지만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

史/그 외 201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