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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늦봄 꽃이 졌습니다. 지난 봄 세상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꽃잎은 모두 흩날려서 사라지고 이제 제법 더운 기가 느껴집니다. 그래도 아직 밤에는 선선하여 술을 마시기 적당하고, 가시지 않은 봄 향기가 코끝을 맴돕니다. 늦봄입니다. 책 읽기 좋고, 생각하기 좋고, 술 마시기 좋은 날이니 왜 문익환 목사님이 자신을 늦봄이라고 불러 주길 바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한 때는 봄을 좋아했습니다. 중춘(仲春)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합니다. 겨울동안 숨죽였던 식물과 동물이 저마다 세상으로 나오고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려는 시기가 바로 중춘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색깔과 향기를 총동원합니다. 이 들뜬 축제와 같은 시기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봄은 짧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만약..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 김남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김남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오월은 왔다 비수를 품은 밤으로 야수의 무자비한 발톱과 함께 바퀴와 개머리판에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를 새긴 전차와 함께 기관총과 함께 왔다 오월은 왔다 헐떡거리면서 피에 주린 미친개의 이빨과 함께 두부처럼 처녀의 유방을 자르며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벌집처럼 도시의 가슴을 뚫고 살해된 누이의 울음을 찾아 우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뚫고 총알처럼 왔다 압제의 거리에 팔이며 다리가 피묻은 살점으로 뒹구는 능지처참의 학살로 오월은 오월은 왔다 그렇게! 바람에 울고 웃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

文/詩 2013.05.18

사랑 - 박노해

사랑 박노해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 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 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 사랑은 회오리,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일어서 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며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의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 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날의 위대한 잉태

文/詩 2013.05.17

행복

행복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일부러' 선택하는 것이다.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 그리고 이루고 난 뒤에 얻는 작은 성과가 행복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산 결과가 행복인 것이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한동안 괴로워야 한다. 그 속에서 가치를 찾을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인과율이다. 어떠한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는 다른 것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해지려는 것을 우리는 도둑놈이라고 한다. 노동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씨 뿌리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고통스러워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잠시 고민을 놓고 사는 것. 아니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잠시 고민을 놓고 살거나 하고 싶은대로만 하고 살수도 있지만 그것이 삶에..

인조실록 8년

왕력연월일간지기사내용서책책수일자인조08163011신사* 망궐례 * 예조가 삼공의 의견에 따라 이번 흉역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날을 정해 교서를 반포할 것을 청하니 종인조실록권221630-010-01인조08163012임오* 승정원에서 누가 보낸지 알 수 없는 고변서를 어떻게 처리할 지 묻자 태워버리라 명. 사신 왈 말세의 인심이 이 지경이었는데 임금이 못된 자들을 풀이 죽게 만들었다.인조실록권221630-010-02인조08163013계미* 예조가 각 능의 오향을 다시 거행하는 것을 대신에게 의논하게 시행케 하자고 아룀. 윤방, 오윤겸, 김류, 이정구가 아뢰기를 태묘에서 오향을 거행하여 능침에서 중복해서 대제를 지낼 필요가 없어 예전에 폐지한 것이니 이는 재정상황이 안좋아서가 아니라 기존의 제례가 번잡해서였..

史/실록 2013.05.13

인조실록 7년

왕력연월일간지내용서책책수일자 인조07162913기미*용골대 등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연로변의 쇄마를 빼앗아 가서 서로 백성들의 괴로움이 커지다 *비국에서 조군과 수군의 역이 너무 고되 늘 기폐하는 폐단이 있으니 대전에 기피한 자를 중하게 처벌하고 다시 본역에 충정하자고 했는데 이유가 있다. 당사자를 충군하는 율은 적용해야 효과가 있을 것인데 조군과 수군의 차이를 두면 안되니 수군으로 대사한 자로 당사자를 충군토록 하자 하니 종 인조실록20권1629-010-03 인조07162914경신*경기 감사 최명길이 고양 등 8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청으로 이송할 것을 아뢰니 종 *최명길이 충장·충익·충순 3위에 옮겨 바꾼 폐단을 아뢰니 군적청에 내리다. 광해조 때 3위에 제멋대로 소속된 자들이 많았다. 반정 이후..

史/실록 2013.05.12

유서. 2013.05

유 서 인간의 역사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지만 삶과 죽음만은 예상치 못한 우연입니다. 저 역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방식으로 삶을 마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의 죽음 이후에 남아있는 일만은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렇게 유서를 남깁니다. 만일 제가 사고로 혹은 병이나 선택으로 삶을 마친다면 유서 원본은 제 후배 유제훈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제 마지막 가는 길은 제훈이가 정리해주면 좋겠습니다. 이 유서는 2013년 5월 작성되었으며 상황에 따라 수정될 것입니다.따로 벌어놓은 재산이 없기 때문에 딱히 드릴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진 경제적 채무는 부모님께 부탁드리기 바랍니다. 그 정도의 경제적 능력은 있을 것입니다...

雜/무제 2013.05.11

한국사대동반 후배들에게

한국사대동반 후배들에게 새벽에 적는다. 나는 참 못난 선배이다. 9년 동안이나 학교를 맴돌면서 만난 후배만 200명이 넘지만 고학번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은 거의 없고 후배들에게 신세지기 일쑤다. 가끔은 내가 보기도 한심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한국사대동반이라는 낯선 공간에 들어왔을 너희가 저 늙은이를 봤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까?다만 내가 한 가지 노력했던 것은 권위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너희보다 나이가 많고 학교에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로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내가 골목대장 놀이에 심취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저 쉬운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 선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너희에게 미안한 점이 너무나 많다. 한국사반은 약간 이상한 곳이다. 이상하다..

짧은 여행의 기록 中 - 기형도

무등(無等)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검은 산들을 거느리고 회색의 구름 숲 속에 무등은 있었다. 나는 지금 충장로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금남로 3가와 4가 사이 '충금' 다방 2층에 앉아있다. 광주고속터미널은 내가 본 그 어느 대도시 터미널보다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었다. 땀이 폭포처럼 옷 사이로 흘러내렸다. 지금은 저녁 6시. 광주에 도착한 지 2시간이 흘렀다. 터미널에서 부산이나 해남 혹은 이리 방면의 차표를 끊으려 예매처를 기웃거렸으나 너무 혼잡하고 더러워서 터미널을 버리고 길을 건너 신문들을 한 뭉치 샀다. 내가 써두고 온 기사가 나와 있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퍼마켓에 들어가 필름 한 통을 샀다. 어디로 갈 것인가. 보도 블록 위에 주저앉았다. 황지우..

文/산문 2013.05.05

봄편지 - 정한용

봄편지 정한용 두 점 사이에 우린 있습니다 내가 엎드린 섬 하나와 당신이 지은 섬 하나 구불구불 먼 길 돌아 아득히 이어집니다 세상 밖 저쪽에서 당신은 안개 내음 봄 빛깔로 써보냅니다 잘 지냈어... 보고픈... 나만의... 그건 시작이 아니라 끝, 끝이며 또한 처음 맑은 흔적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혹시 압니까 온 세상 왕창 뒤집혀 마른 잎 다시 솟고 사람들 이마에 꽃잎 날릴 때 그 너울 사이사이 흰 빛 내릴 때 그쪽 섬에 내 편지 한 구절 깊숙이 스미고 이쪽 섬에 당신 편지 한 구절 높이 새겨져 혹시 압니까 눈물겨운 가락이 될지 섭리가 될지 아프게 그리운 한 흙이 될지

文/詩 2013.05.05

그리움 - 이용악

그리움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文/詩 2013.05.05

조선시대 수군제도의 성립과 변화

조선시대 수군제도의 성립과 변화 1. 조선전기 수군 체제의 정비 조선시대 수군의 편제는 모두 왜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연악 지역을 중심으로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으며 심지어 내륙 깊숙이 혹은 수도 가까이까지 왜군이 침입해온 경우도 있었다. 황산대첩 등에서 왜구를 물리친 바 있었던 조선의 태조는 개국 초부터 왜구 토벌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아직 체계적·조직적 수군제도를 정비하지는 못했고 임시방편으로 각 지방에 수군도절체사를 파견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수군 체제 정비가 시작되어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정점으로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만호(萬戶)·천호(千戶)·백호(百戶) 등의 관직이 설치되었다. 본격적인 수군 체제의 정비와 확장은 태종과 세종..

史/조선 2013.05.05

21세기 한국사학 무엇을 해야하나 - 오종록

21세기 한국사학 무엇을 해야하나 오종록(성신여대) *이 글을 쓰신 오종록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선전기 군제사로 박사를 받으셨습니다. 이 글은 2013년 5월 3일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주최 좌담회의 발제문입니다. 전면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인간에 대해 공부해온 한 학자의 통찰력을 보여주고 생각할 거리를 여러 개 던져주는 글이기 때문에 소개합니다. 아직 21세기의 초입부를 지나는 시점에서 21세기 동안 한국사학이 해야 할 과제를 전망하는 것은 필자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바꾸어서 생각하면,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한국사 연구가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사학의 과제였으나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는 것과 ..

史/그 외 2013.05.04

요한에게 (겟세마네에서)

요한에게 밤은 지독히 검었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있었던 끝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했고 너는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로가 침묵하면서 밤은 더욱 깊어졌고 나는 계속 슬픔의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내 고독의 십자가를 같이 질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너는 최후의 만찬에서 내 품에 기대어 앉은 젋은 요한이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묻고 싶을 때 너를 통했다. 너는 나에게 자랑이고 희망이었다. 베드로조차 너에게 미치지 못했다. 나는 너에게 새 예루살렘 왕국에 대해서 설명해주었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너는 나를 사람의 아들로 믿었다. 아니 적어도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스가리옷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