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료한 103-230 34

독서이력서

독서 이력서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은 식상하지만 사실이다. 한 사람의 신체는 무엇을 얼마나 먹고 자랐느냐에 (절대적이진 않을지라도) 좌우되듯이 한 사람의 사고는 무엇을 얼마나 읽고 자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아주 어릴 적에 읽었던 책이 의외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태어나서 처음 꽂힌 것은 선풍기였는데 선풍기 날개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식겁한 후로는 책에 꽂혔다고 한다. 내 기억에도 자기 전에 엄마 아빠나 이모에게 동화책 읽어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난다. 꽤나 성가신 아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아이가 읽을 만한 책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러 교회로, 또 같은 동네 살던 아는 형의 집으로 전전..

동행이인(同行二人)

일본 시코쿠에 가면 홍법(고코)대사 공해(구카이)의 흔적을 따라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오헨로미치라는 순례길이 있다. 순례자들의 복장은 똑같은데 몸에는 수의를 대신하는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관을 대신해 얼굴을 가려줄 삿갓을 쓰고, 손에는 묘비를 대신할 지팡이를 집고 다닌다. 순례 도중 죽을수도 있는 고독의 길, 실제로 많은 이들이 순례 도중 죽기 때문에, 혹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 깨문에 언제든지 죽어도 될 준비를 하고 걷는 죽음의 길이다. 혼자 걸을 수 밖에 없는 1200km의 그 길을 사람들은 군데군데 놓인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는 표지를 보며 힘을 내고 걷는 다고 한다. 고독의 길을 무형의 동반자를 통해 이겨내는 것이다. 그 동반자는 부처님일 수도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가족일..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종교학에서 신을 신앙하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력신앙이고 또 하나는 타력신앙이다. 자력신앙이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신과 동등한 혹은 신에 근접한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앙이다. 반면 타력신앙은 신의 능력과 도움을 통해 어떠한 단계 이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자력과 타력신앙 모두 단순한 소원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종교적 사상적 수준의 달성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기복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타력신앙이 강조되어온 반면, 아시아적 전통에서는 자력신앙이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인도의 힌두신앙은 수행을 통해 신과 비슷한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중국의 유교 역시 수신을 통해 성현(聖賢)이라는..

늦봄

늦봄 꽃이 졌습니다. 지난 봄 세상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꽃잎은 모두 흩날려서 사라지고 이제 제법 더운 기가 느껴집니다. 그래도 아직 밤에는 선선하여 술을 마시기 적당하고, 가시지 않은 봄 향기가 코끝을 맴돕니다. 늦봄입니다. 책 읽기 좋고, 생각하기 좋고, 술 마시기 좋은 날이니 왜 문익환 목사님이 자신을 늦봄이라고 불러 주길 바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한 때는 봄을 좋아했습니다. 중춘(仲春)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합니다. 겨울동안 숨죽였던 식물과 동물이 저마다 세상으로 나오고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려는 시기가 바로 중춘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색깔과 향기를 총동원합니다. 이 들뜬 축제와 같은 시기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봄은 짧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만약..

행복

행복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일부러' 선택하는 것이다.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 그리고 이루고 난 뒤에 얻는 작은 성과가 행복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산 결과가 행복인 것이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한동안 괴로워야 한다. 그 속에서 가치를 찾을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인과율이다. 어떠한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는 다른 것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해지려는 것을 우리는 도둑놈이라고 한다. 노동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씨 뿌리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고통스러워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잠시 고민을 놓고 사는 것. 아니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잠시 고민을 놓고 살거나 하고 싶은대로만 하고 살수도 있지만 그것이 삶에..

한국사대동반 후배들에게

한국사대동반 후배들에게 새벽에 적는다. 나는 참 못난 선배이다. 9년 동안이나 학교를 맴돌면서 만난 후배만 200명이 넘지만 고학번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은 거의 없고 후배들에게 신세지기 일쑤다. 가끔은 내가 보기도 한심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한국사대동반이라는 낯선 공간에 들어왔을 너희가 저 늙은이를 봤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까?다만 내가 한 가지 노력했던 것은 권위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너희보다 나이가 많고 학교에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로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내가 골목대장 놀이에 심취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저 쉬운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 선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너희에게 미안한 점이 너무나 많다. 한국사반은 약간 이상한 곳이다. 이상하다..

요한에게 (겟세마네에서)

요한에게 밤은 지독히 검었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있었던 끝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했고 너는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로가 침묵하면서 밤은 더욱 깊어졌고 나는 계속 슬픔의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내 고독의 십자가를 같이 질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너는 최후의 만찬에서 내 품에 기대어 앉은 젋은 요한이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묻고 싶을 때 너를 통했다. 너는 나에게 자랑이고 희망이었다. 베드로조차 너에게 미치지 못했다. 나는 너에게 새 예루살렘 왕국에 대해서 설명해주었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너는 나를 사람의 아들로 믿었다. 아니 적어도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스가리옷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컴퓨터로 논문을 쓰거나 사료를 볼 때 작은 볼륨으로 음악을 틀어놓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OST가 재생되었고, 회한에 젖어 2시간 동안 전곡을 다 듣게 되었다. 2003년 런던에서 녹음된 음반은 여러 번 무대에 올려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중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것 같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역사적 예수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 교회의 해석에 갖힌 예수가 아니라 지역적 차별에 시달리던 나사렛에서 자라고 공부라고는 해본 적 없는 어부를 들어 제자를 삼은 청년 여호수아를 좋아한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성노동자, 민족반역자인 세리에게 세상을 사는 가치를 알게 해준 예수를 좋아한다. 그리고 가나의 결혼식장에서 술을 만들어내어 함께 마시고, 위선자와 지식인..

봄비가 내려서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려졌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데 창 밖 가로등의 불빛이 비에 막혀 반은 망막에 닿고 반은 세상으로 흩어진다. 안개비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닫고 향불을 태운다. 향은 유교와 불교 의식에서 모두 올리는 것이지만 의미가 사뭇 다르다. 유교에서 향의 연기는 신이 내려오는 길이다. 향의 연기는 중력을 거슬러 하늘에 닿는다. 그 연기를 타고 신이 내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향을 함부로 태우지도 않고 또 그 향기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불교에서 올리는 향은 다르다. 향은 등, 꽃, 정수, 곡식과 함께 부처님께 올리는 다섯가지 아름다운 공양 중 하나이다. 향불은 연기를 남기고 연기는 향과 함께 공중에 퍼진다. 향은 실체가 없지만 동시에 공간을 가득 채우는 힘을..

기억

가끔씩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문장이 필요했다. 그럴 때면 학교 바로 밖에 있는 동방서적에 달려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2번째 줄에 있는 서가의 중간 쯤 되는 칸을 뒤졌다. 거기에는 시집이 있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한테 5000원 남짓한 시집은 밥 한끼 값으로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호사였다. 실천문학사,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사, 민음사, 미래사에서 나온 한국 대표 시인 100인선... 출판사 별로 꽂혀있는 시집들 사이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하면 시인을 찾았다. 김남주, 함민복, 박노해, 박영근, 김용택, 도종환, 신경림, 이용악, 이성부, 이문재, 정호승, 한하운, 브레히트, 엘뤼아르, 네루다... 때로 운이 좋아 쿠폰을 많이 모으면 작은 시집 하나 정도는 손 쉽게 가질 수 있었..

메모2

사료를 보면서 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제도 만들기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현실론과 이상론 사이 그리고 시행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 새로운 제도를 만들면 생길 부작용들에 대한 걱정, 과거의 제도를 바꾸지 않으려는 마음, 바꿔야한다는 마음, 실험, 실패, 성공, 왕의 반대 혹은 찬성 그리고 그에 맞서는 관료들 하나의 제도가 마련되기 위해 이토록 수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여서 오랜 기간 준비한다는 것을 제도사를 공부하며 처음 알았다. 이것을 현실에 대입해본다면 새로운 제도를 입안하는 관료의 인간적인 선악을 비판하는 것보다 그 제도의 방향성 자체가 옳은가 아닌가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제도의 입안자 자체를 악마화시키는 것은 (설령 그 관료가 인간적으로 나쁠 수 있다고 해도) 사실과 다른..

메모1

역사를 공부하는 동기가 호고(好古)여서 라는 점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결과가 복고(復古)로 맺어져서는 안된다. 과거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일수는 있어도 미래 그 자체일수는 없다. 공자에게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꾸 거기서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해봤자 답이 나올리 없다. 근대 민족국가의 문제를 고구려나 고조선에서 찾는 것 또한 마찬가지에도. 그들은 우리가 있는 지도 모르는데 미래의 문제를 과거에 떠넘기는 것, 혹은 현재의 문제를 고대사에 소급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대학원 지원때 냈던 연구계획서

자료 정리하면서 찾았다. ㅎㅎ 보니 감개가 무량하네. 많이 변했다. -------------------------------------------------------------------------------------------------------- 제가 대학원에서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는 조선후기 불교가 차지하는 사회적, 경제적 위치입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지방의 사찰들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이를 후원하는 세력이 누구이며, 어떠한 이유에서 시주가 이루어졌는지, 나아가 조선 후기 사찰들이 유지되고 재산을 축적해가는 과정에는 재지사족과 일반 민중, 그리고 승려들의 역할이 어떠했으며 불교 자체의 위상변화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사찰문서와 더불어 각종 중건기, 상량문, 불상과 불화의 복장(腹藏)기, 불화의 ..

대선에 관한 메모

대선에 관한 메모- 상처받은 나와 내 벗들을 위하여 대선이 끝났다.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계급을 배신하고 개혁세력이 당선되기를 바랬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지난 오년동안 운동의 토대가 얼마나 초토화되었는지 이야기하는 한 선배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졌다. 이제 다시 오년동안 얼마나 더 많은 시련을 겪을 지 모르겠다. 과반이니까, 투표율이 높았으니까 인정한다 라는 식의 자유민주주의적 태도는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선거의 결과는 뒤집을 수 없다. 그러나 정치적 옮바름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상황을 객관화시키며 박수를 쳐주는 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아직 절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송전탑 위에, 공장 밖 천막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슬퍼 울 눈물만 남아있을 뿐..

현재의 여사재 상태

여사재라는 공간은 온라인 상의 내 블로그이지만 오프라인에서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내 방 겸 서재이기도 하다. 여기서 대부분의 공부가 이루어진다. 방 전경그나마 청소한 것 책상 근처의 상황 책상 위에는 주로 전공서를 쌓아 놓았다. 급하게 봐야할 것들. 그래서 사회경제사, 군제사 책들이 위를 차지하고 있다. 책상 왼쪽의 책들. 한국사, 동양사 책들이 대부분이다. 역사이론과 서양사 책도 간혹 섞여있다. 좀 깨끗했던 예전 책상 위지금은 안이렇다. 더러워졌다. 책상 오른쪽. 단성호적, 고문서집성, 조선왕조실록, 문헌통고, 국편 한국사 등이 쌓여있다.주로 사료를 놓는 곳 책상 왼쪽의 본래 기능을 읽은 장식장.잘 안읽지만 꺼내보는 책들을 쌓아 놓았다. 책상 뒤편 침대 발치의 책무더기. 도록, 서양사책들, 역사이론서,..